소개합니다! SFC/강령 구현

알돌론(리더쉽) <알돌양육 메뉴얼, 부산지역 학생신앙운동 1995>

노랑 테니스 공 2023. 5. 12. 13:58

 

마태복음 4장 19절, 16장 25절~26절, 사도행전 1장 8절, 20장 24절, 골로새서 1장 28절~29절

 

I. 알돌이란?

 

알돌이란 한 자연인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해낼 줄 아는 사람이며, 학신의 영적리더로서 최소단위의 작음모임을 기본적으로 인도하며 단위 학신의 운동전략을 입안하고 수행해가는 운동원을 말한다.

 

1. 알돌은 조원의 '신실한 영적 아버지' 이다.

 

알돌은 성경공부와 다른 모든 만남과 그가 인도하는 작은 모임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한 인격, 인격이 신실한 성도로 자라가도록 돕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자라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인격을 위해서 기도하며 만나서 교제하며 함께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그의 영적인 변화와 성숙을 돕는 아버지다. 그러므로 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알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알돌은 학원 SFC의 '핵심 리더' 이다.

 

알돌은 SFC의 최소단위인 작은모임의 리더이자 한 큰 모임의 핵심운동가이다. 그러므로 작은 모임 하나만을 이끄는 것으로 알돌의 책임을 다 감당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한 학원의 운동방향과 학기 계획, 준비, 실행에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하며 담당간사와 함께 그 모임의 전략을 수립하며 목표를 결정하는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는 다른 운동원들을 격려 고무하여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강령을 그가 속한 학원에서 이루어내도록 운동에 함께 동참시키며 계속적인 추진력을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알돌이 된다는 것은 그가 속한 운동에 있어서 대표성과 책임성을 가지는 것이다.

 

3. 알돌이란 소그룹의 리더이다.

 

알돌은 '인도함으로서 섬기는 종' 이며 '섬김으로서 인도하는 종' 이다. 알돌은 그 작은 모임의 조원들에게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서 비전을 제시해야 하며, 그 조원들이 서로를 잘 알도록 모임 안팎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주도해야 하고, 조원들로 하여금 어떤 모임을 주최, 인도하도록 하여 조원들의 은사를 계발하고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일과 여러가지 갈등을 해결하려는 모험과 전도의 사명 감당을 쉽게 수행하도록 도우면서 그 모임의 분위기와 계획들에 기대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종종 알돌들이 자신의 리더쉽에 호응해줄까를 염려하지만 기꺼이 그 모임을 이끌어 보려는 위험을 무릅쓸 때 비로소 섬기고 있는 것이다.

 

II. 예수의 알돌론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방법을 찾고 기술을 부러워하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프로그램 중심으로 일하려고 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결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사람 구원의 미련한 방법이신 전도로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고전 1:18-21) 사람을 그의 재료로 사용하셨고 마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그 자신)를 인류 구원의 도구와 방법으로 쓰셨듯이 그도 사람(제자)을 세상 구원의 방법으로 쓰셨다. 그리고 그는 출발하셨다. 사람(제자)를 가지고.

 

1. 소수 선택의 원리

 

오늘날의 경향은 대중을 중요시하고 소수의 정예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대중이 그를 따르게 되었을 때 전략적으로 소수를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세계를 품고 인류를 구현하시려는 넓고 큰 뜻을 가지고 계셨으나 소수를 선택하시고 소수 안에서 이를 구분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는 열둘을 부르시고 그 중 셋을 집중훈련하셨으며 또한 그들 열둘을 중심으로 70인 제자를 부르시고 70인을 통하여 120인의 제자들을 훈련하신 것 같다. 그리고 120인의 문도들을 통하여 500여 형제를 이끌도록 하신 것 같다. 그러나 그 자신은 소수 열둘을 부르시고 시간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지내신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하는 모두가 제자삼을 대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시고 12인을 택하셨듯이 집중적인 훈련을 위해서 소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각가가 동시에 500개의 조각품을 손댈 수 없는 것과 같이 제자로의 조각은 소수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

 

2. 교제의 원리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자유로운 교제로부터 단계적으로 제자들과의 사귐을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다.

 

1) 초대의 교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의 초대를 받아 주님과 함께 얼마간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빌립을 만나셨을 때도 '와보라' 고 초대하셨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와 교제를 갖도록 초대한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하셨다(요 1:43, 1:46)

 

2) 양육의 교제

그후에 주님은 그외 얼마간 동거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을 일반적인 제자로 부르신 것을 볼 수 있다. 야고보, 요한, 알드레와 베드로가 그물을 깁고 있을 때(막 1:17)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는 제자의 부르심을 하셨다. 그러나 이때에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즉시 따랐다.

 

3) 사역의 훈련과 무장을 위한 선택적 교제 

이렇게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 주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있게 하시려고 12인을 부르셨다. 천국복음 선포의 권능을 주시며 그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었다. 그후부터 주님은 그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셨고 그의 때가 다해감에 따라 긴밀한 교제를 가지셨으며 십자가 직전까지도 함께 계시면서 가르치신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아주 자세히 주를 관찰했기 때문이며,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4) 연합의 교제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인과 온전히 하나가 되셨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고 하셨다. 성령강림 후 (행 2장) 그는 제자들의 모든 사역지에 땅끝까지 항상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고 고백했다. 양육자와 피양육자와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기도 안에서, 주 안에서 영으로 항상 함께 있어야 하고 그 사실을 피양육자가 알고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고전 5:3)' 라고 훈련자 바울은 말했다.

 

3. 인격의 성화 훈련의 원리

 

1) 각자에게는 신앙성장의 과정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그가 받으실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잔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성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양육하셨고 그들의 바른 신앙고백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을 듣고 나신 후에야 (마 16:16) 비로소 이때로부터 예수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에 대해서 (마 16:21) 가르치기를 시작하신 것이다.

 

2) 각자에게는 또한 영적인 성화의 과정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인중에서 갓난아이로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고전 3:1-2). 바울은 시기와 분쟁, 질투에 사로잡힌 고린도 교인의 성화과정을 인정하고, 젖으로 먹이고 무리하게 밥으로 양육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숙한 제자 디모데를 향해서는 값을 치루며, 생명을 치루는 헌신의 신앙을 명령하고 있다(딤전 5:21, 딤후 4:1).

 

3) 각자에게는 인격성장과 계발의 과정이 있다(요 1:42).

사탄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때를 제외하고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인격을 책망하신 사건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거품처럼 성급한 성품의 단기적인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반석, 바위)' 고 격려하셨다. 우뢰의 별명을 가진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만드신 분도 주님이셨고, 신구약을 걸쳐서 많은 경우 새 이름을 주심으로 새로운 자화상을 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축복된 인격을 계발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4) 이와 같은 성화로의 양육을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권면들이 있다.

첫째로, 인격과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과의 전적인 동행을 강조하며 항상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앙의 성장과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찾아 따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4. 분여와 삶의 모본을 통한 시범의 원리

 

1) 분여

제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나우어 주는 일이다. 진정한 부모의 양육은 자식을 위하여 생애를 그들의 거름으로 삼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어서 모든 것을 제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셨다. 끝까지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요 13:1).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피와 생명을 하나하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의 훈련의 삶은 그의 생애를 나누어 주는 삶이었고 진정으로 영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요 15:15, 요 17: 4,8,14 요 15:11, 요 16:33, 요 17:13)

 

2) 삶의 모본과 시범

예수님은 항상 모범으로 교훈하셨고 가르치셨다. 예를 들면 그의 기도의 생활을 볼 수 있다. 그는 종종 제자들을 데리고습관을 따라 동산에 가셔서기도하셨다.일만 시간의 기도이론을 가르치는 것보다 단 한 번 기도생활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서로 섬기는 종의 도를 가르치실 때도 직접 대야에 물을 떠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렇게 주님의 삶의 모범을 통해서 전도와 양육의 실천과 시범을 통해서 장차 지상 명령을 맡길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5. 파송과 현장 실습의 원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고 보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면밀한 계획을 가지시고 훈련하신 후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도록 파송하셨다. 12인을 파송하셔서 그들 자신이 독자적으로 행하도록 훈련하셨으며 나중에는 70인을 파송하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도록 하셨다.독자적으로 해보지 않은 일은 결코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주님은 실전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지휘관처럼 '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 우려 가운데 서로 두 사람씩 짝지어 독자적으로 실천하면서 배우도록 내보내셨다.

 

6. 감독과 지도의 원리

 

열두 제자가 돌아온 후 주님은 그들의 보고를 받고 그들에게 필요한 조치와 교훈을 하셨으며, 70인이 돌아온 후에도 주께서는 그들의 열매를 체크하시고 잘못된 점은 지적하시고 교훈하시며, 칭찬하시고 기뻐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7. 재생산의 원리

 

주님은 재생산을 기대하셨다. 그는 재생산을 위해 열둘에게 그의 모든 생애와 생명을 쏟으셨고 자신을 주셨으며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시고 훈련하셨다. 그리고 재생산을 명령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바나바는 바울을 양육했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야육했으며 디모데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도록 양육하고 가르쳐서 그 가운데 충성된 사람들을 선택해서 훈련했고, 그 충성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 도 다른 사람에 속에는 수천대를 거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8.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게 함의 원리

 

모든 훈련으로도 제자들에게는 부족했었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길 빡에는 없었다. 그들은 양 같았었고 세상은 독사와 이리 같았으므로 주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전적으로 위탁되고 충만되어 그 능력에 의지할 것을 명했다. 오직 성령을 어디서나 언제나 부르고 의뢰하며 그 능력에 의지하여 담대히 일하게 해야 한다.

 

III. 알돌이 갖추어야 할 것들

 

1. 개혁주의 신앙으로 충일해야 한다.

 

우리 운동은 개혁주의 신앙으로서의 복음화와 교회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의 알돌을 동일한 신앙고백과 동일한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가 아무리 헌신적이며 인간관계가 원만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신앙이 개혁신앙 위에 굳게 서 있지 않다면 우리 운동의 알돌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알돌은 개혁신앙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하며 이것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적 가치관이 선명하게 확립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2.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충만해야 한다.

 

양육은 한 영혼이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헌신하는 해산과 같은 인고의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집든을 위해 헌신할 때 보다 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 있는 수고로운 사역이다. 몇 달 동안 혹은 몇 해 동안 하나의 영혼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고 그를 위해 예수님의 아픔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빌 1:8)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사역이다. 따라서 한 영혼에 대한 가치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알돌이 될 수 없다.

 

3. 성숙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

 

알돌은 개혁신앙에 대한 이해와 공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성품에 있어서 성도로서의 변화가 있엇야 한다. 그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교회 봉사에 있어서 다른 운동원들과의 삶을 나눔에 있어서 성도로서의 변화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슴을 사모하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벧전 2:2, 렘 15:16, 시 63:5-6, 빌 3:12) 거룩한 삶을 갈망하며 요일 2:3, 벧전 15:16, 시 51:10)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며(시 42:2, 63:1), 일관성 있는 믿음의 삶을 사는 자여야 한다(딤전 4:11-12, 살후 3:9, 빌 3:17, 고전 11:1).

 

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 자신의 전공에 충실해야 한다. 알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직분을 게을리 한다면 성숙한 성도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이다. 알돌로서의 봉사와 전공 공부 이 둘을 위하애 우리 운동은 팀사역을 강조한다. 한 두명의 알돌이 서로 동역하는 가운데 운동을 전개해 감으로써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4. SFC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비전이 있어야 한다.

 

위의 두 가지가  갖추어지면 그는 어디서 헌신하더라도 주의 나라를 위한 헌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알돌이 학생신앙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라면 캠퍼스에서 학생신앙운동이란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함은 분명한 것이다. 이 운동이 표방하는 바와 이루고자 하는 것, 이 운동에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흔적, 내가 여기서 감당할 수 있는 것등을 생각하고 확고한 비전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사역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헌신한 이 운동의 학원 복음화 전략에 대한 분명한 이해이다. 자신이 헌신한 운동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략을 모른체 리더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돌은 우리 운동의 양육 방법인 3단계 7과정의 철학과 운영방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어야 하며 조직과 큰 모임의 전략 등을 알고 계획하며 캠퍼스를 보는 안목도 겸비해야 한다.

 

5. 작은 모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알돌은 기본적으로 SFC의 작은 모임 리더로서 SFC에서 작은모임이 갖는 전략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소그룹의 성격과 요소들은 무엇이며 그 소그룹이 주로 어떤 주기로 발전해가는지, 어떻게 삶을 나누어 온 조원들을 격려하고 그들로 하여금 성도로, 학생신앙운동원으로 살게할 것인지, 학원복음화에 동참케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IV. 학원과 사회를 바라보는 알돌의 비전

 

1. 우리가 왜 이 캠퍼스에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의와 공도를 행하며 하나님의 교정사역에 협력하는 것인데(창 18:16-20), 우리는 이 대학의 세월 속에서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대학에서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생명을 걸고, 70-80년대 개발도상국에 처해있던 이 나라를 좀 바로잡아 보려고, 이 땅 위에 진정한 사회정의 실현해 보려고 이 일을 위해 투쟁하며 때로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가는 모습을 볼 때에 우리는 그들 앞에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질 맑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 하나에 그들은 생명을 걸었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드렸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학으로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일의 세대를 정복하려면 오늘의 대학을 정복하라." 이는 한 국가의 앞날이 그 나라의 대학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생들이 미래사회의 주도적인 계승자이기 대문이다. 이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에 미래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캠퍼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결론은 분명하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성경적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들을 연구하여, 우리의 인식틀이라 할 수 있는 기돌교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작업이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우리의 전공은 성경과 자기 학과의 전공일 것이다. 어느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사회정의의 회복자로서 하나님과 협력하여 이 캠퍼스 속에 있는 미래 세대의 계승자들을 향하여 교정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고, 변질된 그들의 가치관을 바로 잡아주고, 쾌락주의 문화에 몰입해 있는 그들에게 근면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고, 대학 안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사탄적인 문화를 복음 안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2. 자기 시대를 섬기는 종

 

다윗의 전생애를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요약하였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삳ㅇ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 13:36)' 이렇게 다윗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다.' 고 말했다. 그 시대에 자기 자신과 한국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섬기다가 가는 생에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이렇게 다윗처럼 시대를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사무엘 처럼 역사 의식과 시대 감각을 가지고 그 시대를 꿰뚫어 보며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돌은 이 시대와 교회를 섬기기 위하서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에 신문을 들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신앙이란 세상과 담을 쌓고 에배당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로 역사라는 현장에서 신앙을 표현해야 하며, 이 역사를 다스리며 통치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기독교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예배당에서 예배만 드릴 수 없고 자신의 신앙 성숙에만 관심을 가질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게서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개인경건에만 열심하고 역사 의식과 시대 감각이 없던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하시면서 맹렬히 책망하신 적이 있다.

 

V. 알돌의 댓가와 영광

 

1. 사랑의 수고

 

요한일서 4:8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수고를 하셨다. 특히 그 수고는 무죄한 의인이나 훌륭하고 존경할 만하고 숭고하고 매력이 넘치는 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망 없는 실패자요 반역자요 죄인이고 원수된 죄인을 위해 베푼 수고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아들의 목숨을 버리시기 까지 수고하셨다.

 

이렇게 사랑느 기꺼이 수고르 ㄹ동반한다. 사랑의 수고란 한 영혼을 향한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고통을 말한다. 이같은 사랑의 수고 없이 운동원들에게 그리스도 아네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영혼들을 향한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쏟아가는 아돌들로 세워지기를 바란다.

 

2. 자랑의 면류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길 대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이 고백은이름 없이 빛도 없이 어린 영혼들의 영전 성숙을 위해 자신을 소모품처럼 불태워버린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겠는가?

 

알돌들의 수고와 헌신은 죄악으로 인하여 칠흑 같은 어두운 이 땅에 역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며, 알돌의 수고와 헌신은 이땅에생명탑을 놓아갈 일꾼들을 키우는 일이며, 인류의 횃불이 되어 소모될 영혼들을 양육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양육의 일에 더욱 헌신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