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6년에 발간된 『학생신앙운동 ABC』 1판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1997년은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이 이 땅에 태어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운동은 해방직후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기도의 작은 모닥불로 타오르기 시작하여 1947년에 '학생신앙협조회'란 이름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 7월에 이르러 '전국학생신앙운동'이란 이름으로 비로소 전국적인 운동의 첫걸음을 떼었다. 이러한 학생신앙운동의 태동과 시작은 한국사나 교회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사에 있어서는 가장 큰 격동의 시기인 해방과 6.25 전쟁이 있었고, 교회사적으로는 일제하에서 행했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운동과 더불어 해방 이후의 교회와 신학재건운동이 진행되는 때였다. 학생신앙운동은 이같이 중요한 시기에 순수한 학생들에 의해 민족의 장래를 위한 작은 기도모임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발전해 갔다. 이제 이 운동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발자취를 대략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배아기 (1945.8 - 1946.9)
1945년 8월 15일! 그 날은 우리 민족이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던 날이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환희와 희망의 날이었다. 이 날은 비단 일제의 탄압과 억압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치하 어두운 조국의 역사와 함께했던 교회도 그러한 환희와 희망의 장에 동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도 해방과 함께 일제의 기독교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환희와 희망은 치욕의 세월에 대한 반성과 청산 없이는 온전한 것일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거룩적으로 일제식민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야 했고, 교회적으로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결정된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감당해야 했다. 바로 이것이 사회든 교회든 역사를 새로이 세워가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을 신민지로 삼은 뒤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정복양욕을 이루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로 정하고, 우리 민족을 이 일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또한 그들은 우리 민족성 말살을 위해 말과 글을 폐지한데 이어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등을 통해 조선인의 일본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일은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전시 국민총동원령 등을 발표하면서 더욱 절실해졌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많은 국민, 특히 기독학교와 교회의 커다란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강행되었다. 신사란 일본의 국조신이라고 하는 천조대신과 그 이후의 종신을 섬기며, 천황을 만세일계의 현인신으로 섬기는 민족종교의 본상이다. 일제는 이러한 실사챔배를 종교적 행위가 아닌 국민의례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참여할 것을 명했다. 이에 대하여 끝까지 저항하던 조선 예수교장로회마저도 1938년 9월에 열렸던 제27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므로 일제의 강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한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수범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황국신민으로서 열성으로 다하기로 기함'
이러한 신사참배 결의는 우상숭배를 금하신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범죄였으며, 민족에 대한 배반이었다. 그래서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결정이 성경과 신앙양심에 위반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개인적으로 반대하기도 했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상동 목사는 1939년 3월에 했던 "3대 탄식"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선의로 창조한 만물을 국가가 악의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탄식한다."고 외치면서 그러한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당연히 그것에 반대하던 자들은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사선을 넘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도 나오게 되었다.
해방으로 인해 교회는 그러한 압박과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투옥되었던 성도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개혁의 기본원칙'이 발표된다. 이것은 일제의 강압에 패배한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신사참배를 통회자복하는 회개운동과,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당했던 신학교를 재건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회개운동과 신학운동을 양축으로 하는 교회재건운동은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무리들에 의해 왜곡되고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이미 일제시대부터 겪어오던 양분화의 골을 더욱 깊이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양분화는 신앙적으로는 신사참배 찬성파와 신사참배 반대파로,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지역적으로는 서울지역과 경남(부산)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 이후의 혼란과 가등 속에서도 교회의 회개운동에 동참하던 일단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결정하거나 행했던 것은 아니지만 신사참배가 한국교회 공동체의 죄악임을 깨달았고, 어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여기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런 생강르 가진 일단의 학생들은 부산의 제일영도교회(당시 한명동 목사 시무)에 모여서 기도의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 조그마한 모임이 오늘날 학생신앙운동의 모체가 된 모닥불 기도회이다.
이처럼 학생신앙운동은 일제에 의해 무너져 내린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첫걸음인 회개운동 가운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오직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알고 계셨다. 하나님게서는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나라를 위해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한 회개운동 속에 학생신앙운동의 산실을 마련하고 계셨고 그 속에서 학생신앙운동은 소리 없이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2. 형성기(1946.10 ~ 1952.6)
해방후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회개운동에 동참했던 일단의 학생들은 그러한 시대와 교회 상황 속에서 기독학생들로서 자기들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서로 뭉쳐서 매주 토요일마다 한명동 목사의 사택에서 기도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처음에는 생각나는 대로 기도하던 이들 학생들은 점차 세 가지 방향으로 기도제목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학업충실이다. 이는 학생의 본업은 역시 학업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 학생들은 불신 학생들보다 주어진 학업에 더 충실하여 좋은 결과를 낳으므로 그들에게 본이 되고, 부모님과 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학생들이 되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힘있게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다.
둘째는, 복음전도이다. 학교를 자신들의 전도구역으로 정하고 불신 친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자신들의 말이, 행동이, 실력이 복음전도를 위해 잘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셋째는, 교회봉사이다. 그들이 모두가 학생인 관계로 어른들처럼 물질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없으므로 그들은 시간과 몸을 바쳐 섬겼다. 교회당 청소와 화단정리, 주일학교 후배들을 지도하고 안내하는 일, 심지어는 신발장에 신발 넣는 일등 교회 안에서 봉사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건 찾아 나섰다. 한마디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밀알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처럼 학생들의 기도는 자신과 학원과 교회 모두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모임의 명칭은 1947년에 와서 '학생신앙협조회'란 이름으로, 1948년에는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국학생신앙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이 무렵 학생들의 기도운동을 좀 더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한부선 선교사가 이끄는 청년신앙운동이란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1946년 초부터 부산 YMCA회관에서 매주 월요일에 모임을 가졌는데 학생신앙협조회 출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년신앙운동을 통하여 그 열정을 연장할 수 있었던 학생신앙협조회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또 다른 도구를 통해 영적으로 더욱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1946년 9월에 부산에 개교하게 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와 고신대학원의 전신)였다.
당시 서울에는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전신)가 있었다. 그러나 신앙적, 신학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과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고 가르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던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진리운동을 계승하고, 신학교에 훌륭한 신앙 인재를 입학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신앙운동의 힘을 집결하는 목표를 가지고 그 두 모임을 엮어 가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의 수행은 기독 청소년을 위한 수양회 개최로 나타났고, 이 수향회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계속되어졌다. 이 수양회의 위원은 주로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맡았는데 홍반식, 오병세, 이근삼 박사들이 이 가운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52년 7월 21일부터 28일 사이에 모였던 제6회 수양회 기간 중 학생신앙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이 결의가 된 것이다.
이 수양회를 통해 학생들은 회개운동, 기도운동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와 전도운동에 열심을 내었다. 특히 1949년과 1950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부산 시내 전도대회는 대단한 것이었다. 1950년 4월, 5월의 전도대회는 부산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했는데 각 교회가 지역을 나누어서 맡고, 3개 초등학교에서 연합으로 전도집회를 가졌다. 한마디로 학생들은 부산에 거하는 모든 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는 열심으로 가득 찼다.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모였던 학생신앙협조회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학생신앙운동으로 태어나기까지 그 신앙적 열정을 유지시켜 주는 데 있어서 청년신앙운동과 고려신학교가 주최한 수양회는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 두 모임은 기독학생들에게 기독신앙인의 기본이 기도, 성경, 전도임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체험할 수 있는 계시글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3. 조직기(1952.7 ~ 1954)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렸던 부산의 거리는 혼란과 공포와 죽음의 도가니였으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고려신학교가 주최하던 수양회는 쉬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그 주도권이 부산학생신앙운동에게로 넘어왔고, 마침내 제6회 수양회는 부산학생신앙운동의 주관 아래에 1952년 7월 21일부터 28일 사이에 피난지 한복판인 부산남교회(당시 부산 남포동 소재)에서 개최되었다.
'제6회 전국기독학생신앙운동 하기 수양회'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전국적 규모의 수양회였다. 수양회 기간 중인 7월 24일 밤 예배 후 수양회 사무실에서 각 지방 대표들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학생신앙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뜻을 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부산, 대구, 진주, 마산지방은 대표 3인으로, 기타 지방은 1명으로 하여 학생신앙운동 조직준비위원회로 모일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때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다음의 그 발표의 전문이다.
"이 폐허로 화한 땅 덩어리 속에서도 새 생명은 움직인다.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보고 비관하고 물러 설 자는 물러서라. 그러나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 앞에서 살리신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있다. 이제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리리니 신앙 동지여, 굳게 일어서라. 하늘로 귀를 기울이라. 참된 주의 음성을, 피로 짓밟힌 이 제단과 피로 물들인 조국의 가슴속에 전할 자 누구냐.
사랑하는 신앙동지여 실로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과거 6년간 아무 소리 없이 이 생명을 위한 운동을 주의 은혜로 이루어 왔다. 모든 기독학생운동이 큰 환란과 싸움 속에 휩쓸려 허수아비같이 사라졌을 때라도 우리는 주의 믿음과 열로 이 시련의 역사를 승리로 굴복시켰다.
동지여, 이제 우리는 전국대회의 필요를 필연적으로 확신한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란 이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 속에 전능과 능력과 섭리로 역사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의인 열 사람, 이는 소돔 고모라가 필요로 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이 슬픈 조국의 제단에는 한 사람의 제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아! 실로 한심한 조국의 제단이 아니었던가.
동지여, 우리는 철석같이 믿음과 힘과 열로 단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 전국대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파숫군, 그리스도의 전달자, 죄와 세속주의와 권력에 타협 않는 아 - 실로 비참한 암흑 천지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 동지여, 굳세게 믿음으로 일어서라."
이 발표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학생신앙운동은 한국교회재건을 위한 제물로 사용될 것을 헌신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암울한 사회와 교회의 형편에서 벗어나 이 민족이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을 자기 몫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이 민족동란으로 인한 피난길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 깊은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952년 7월 26일에 모인 제1회 준비위원회에서는 전국대회 준비를 위한 조직을 갖추었고, 그 다음날 열렸던 전국대회에서 "중앙학생신앙운동"으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이름은 1953년 1월에 열렸던 제2회 임시대회에서 "전국학생신앙운동"으로 개정되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954년 1월에 있었던 제4회 임시대회에서는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전국적 조직의 윤곽을 잡게 되었다.
학생신앙운동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조직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을 특별히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학생신앙운동이 한국교회의 특정 교단과 깊은 관계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총회-노회-시찰회-개체교회"의 조직에 상응하는 "전국-지방-지구-개체 학생신앙운동"의 조직을 갖추고 있는데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1952년에 10월 16일에 발회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파(이후 고신으로 통침함)와의 관계 때문인데 1953년 1월 전국학생신앙운동 제2회 임시대회에서 "본 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의 헌법을 준수하고 그 산하에 속한다."고 규약을 개정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학생신앙운동이 고신 측과 관계를 맺은데에는 한명동 목사, 한부선 선교사, 박윤선 목사와의 관계 때문이다. 앞의 두 분은 학생신앙협조회로, 청년신앙운동으로 그리고 박윤선 박사는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로 학생신앙운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고신측이 발회하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에 학생신앙운동은 자연스레 고신측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맺어짐은 회개운동과 신학운동을 통한 교회재건운동에 한 마음이었던 고신측과 학생신앙운동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개체조직을 교회와 학원조직으로 나누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회재건운동, 기도와 회개운동만이 아니라 전도운동을 중요한 목표로 두고 운동의 대상을 기존의 교회만이 아니라 아직도 복음이 증거 되지 않은 지역과 이웃까지로 넓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민족의 암울하고 상처 입은 심령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묘약은 복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학생신앙운동이 자기의 이름과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던 때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암울한 순간이었고 가장 비참하게 모든 것을 체념할 수 있는 때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했다는 것은 민족 사회와 교회에 대한 학생신앙운동원들의 헌신과 참여의식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조직이 고신 측이라는 한 교단에 자리함으로써 이후 학생신앙운동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안에서 학생신앙운동은 진정한 신앙운동으로 자라도록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물질적인 후원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학생신앙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는 것으로 암울했던 현실에 대해 능동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으며, 고신교단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정되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4. 성장기 (1955 ~ 1963.8)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한 학생신앙운동은 그 후 조직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한 일련의 몸부림을 시도한다. 그것은 특별히 고신 교단과의 관계 속에서 세 가지로 양상이 나타난다. 세 가지란 지도위원 위촉청원, 학신 주일 설정 건의 그리고 전임사역자(간사) 청빙을 위한 요청이다.
학생신앙운동이 교단과의 관계 속에서 그 성장을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였다. 왜냐하면 학생운동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교단의 지도로 극복할 수 있었고 인적, 물적 지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학생신앙운동을 교단의 조직 속에 받아들인 고신 총회는 총회대로 이들을 잘 지도해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제물로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책임감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 필요와 책임의 인식으로 인해 학생신앙운동은 1953년 8월 제3회 정기대회에서 총회에 전국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 위촉을 청원하기로 결정하고, 제3회 교단총회(1954.4)에 이를 제출했다. 이에 교단은 1956년 4월에 열린 제4회 총회에서 학생지도위원이라는 특별부서를 둘 것을 결정한다. 이때 선출된 위원은 위원장에 한명동 목사, 서기에 윤봉기 목사, 위원에 송상석, 한상동, 박손혁, 장석인, 황철도 목사 등이다.
이렇게 구성된 지도위원은 학생들의 신앙적인 자치활동을 인정하면서 신앙과 신학적인 면에서 선도, 교정하여 주며, 자신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들을 주선하여 주었다. 이는 학생 자발성을 인정하면서 뒤에서 밀어주는 지도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리언 지도위원회의 역할을 지금까지도 학생신앙운동이 성장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학생신앙운동의 성장을 위한 몸부림은 1961년 8월 정기대회 시에 결의했던 두 가지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는 학생신앙운동을 위한 특별기간(1962.1.11 ~ 17)을 정해 달라는 청원이었고, 또 하나는 이 운동을 위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는 전담 사역자를 세워 주되 그 생활비를 총회에서 부담해 줄 것을 청원한 것이다. 이 청원이 총회에서 즉시로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특별기간에 대한 청원은 1969년에 SFC 주일을 교단 교회가 지키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전임 사역자 건은 1971년 김만우 강도사가 초대간사로 세워지면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학생신앙운동은 스스로 자기 성장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한 재정적, 인적 필요를 총회에 요청했던 것이다.
이 기간에 중대한 교회사적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1960년 12월 13일 고려 측과 승동 측의 합동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합동은 불과 34개월 만인 1963년 9월 17일에 깨어지고 합동 이전의 상태로 환원하게 된다. 이런 사건 속에서 학생신앙운동은 1961년 1월 10일, 제30차 정기위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에 있는 학생단체를 합동총회가 인정한 학생신앙운동으로 단일화해 줄 것을 합동총회에 건의하게 된다. 여기에서 '학생단체'란 합동 이전의 승동 측에 있던 학생면려회를 말하는 것으로, 기존 고려 측의 학생신앙운동으로 단일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분리 환원 이후 학생신앙운동 역시 나누어져 각각의 환원총회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같은 강령을 외치는 두 개의 학생신앙운동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안타까운 역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학생신앙운동이 고려파를 넘어서 다른 교단으로까지 확산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학생신앙운동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인적, 물적 한계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한 한계를 잘 보충해 줄 수 있었던 것이 고신 총회와 그 산하의 교회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노력은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이러한 학생들의 요청에 대해 교회 역시 최선을 다해 책임성 있게 응답했던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학생신앙운동의 성장은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5. 전환기(1963.9 ~ 1971)
환원 이후 고신의 학생신앙운동은 분열의 후유증과 답습된 체계에 대한 권태감으로 인해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차츰 계속적인 성장을 위한 시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는 전임간사제 도입과 학원 운동으로의 확장이다. 이는 학생신앙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교단 총회에 의해 지도위원회가 임명되었지만, 지도위원이 가지는 교회사역이라는 한계 때문에 전임 사역자에 대한 요구가 계속 일어났다. 보다 직접적이고 전문적으로 운동의 현장에 참여하고 그것을 확대시켜 나가는 일에 있어 학생들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전담 사역자의 필요는 가히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청은 1958년 제9회 정기대회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이를 의논하고 교단 총회에 건의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보류되어져 왔다. 그러다기 1970년 말에 전임 사역자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고, 1971년 1월 동기수양회 이후 양성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선배들의 지원으로 유급 간사가 세워졌고, 그 해 제21회 총회에서 이 간사제에 필요한 총회 교육부의 인준과 총회의 승인을 받으므로 간사제도가 정착되었다. 초대 간사에는 김만우 강도사가 취임했고, 그는 간사 활동의 개척자로서 심혈을 쏟았다.
이렇게 세워진 간사 제도는 그동안 학생중심의 성격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지도위원을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학생자발운동이라는 장점은 학생이 가지는 한계 외에도 운동의 연계성이 끊어지는 약점도 있었다. 그러므로 전임 사역자인 간사제도는 이러한 연계성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아울러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면에 있어서도 지도위원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학생신앙운동의 대전환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계기는 1971년 10월 15일 ~ 19일에 부산 동래 기독교 수양관에서 열렸던 "SFC 지도자 수련대회"였다. 이 수련대회를 개최하면서 발송했던 초청문을 보면, 학원(특히 대학) 속에서의 신앙운동에 대한 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초청문의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 선배들이 물려준 SFC 운동을 외적으로 확장하고, 내적으로 심화시킬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읍니다. 신앙질서를 파괴하고 수많은 영혼을 오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유혹하는 사이비 신앙운동이 학원과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상아탑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내적 결속을 공고히 하지 못하여 외적으로 통일된 행동과 강한 설득력을 행하사지 못하고 안타까와만 하고 있읍니다. 지금은 체념과 방관할 때가 아닙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진리의 횃불을 들고 학원과 사회, 국가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총 진군할 대입니다. 학원을 주께 바칠 때 입니다. 우리의 염원이던 간사님도 모시게 되었고 유능한 SFC 운동원들이 각 지방에 산재해 있으니 우리의 이념과 강령을 재확인하고, 우리의 사명 완수에 일체감을 가지고 매질할 수 있도록 준비할 기회가 필요하게 되었읍니다.
실제로 이 모임에서 토의된 중요한 안건 중 하나가 학원 복음화의 구체적인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학원 SFC'란 조직이 초기부터 학생신앙운동의 조직 속에 있어 왔으나 그동안의 활동은 주로 교회에만 치중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학생신앙운동은 중고등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학원 속에서 별도의 조직을 가지고 정기적인 모임을 하며 활동을 가져야 한다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특별히 그러한 방안이 대학의 학원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는 측면에서 이는 학생신앙운동 역사에 있어 새로운 전화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학생신앙운동에 있어서 대학생들의 역할은 주로 중고등학생 중심의 학생신앙운동을 섬기는 위원이라는 직분으로 발휘되어졌다. 이런 면에서 대학 내에서 학생신앙운동을 펼쳐간다는 것은 대학생들이 학생신앙운동의 위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운동원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고등학생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영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훈련받아야 하는 자로 인식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비록 전임 사역자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을 지도한느 전문적인 사역자로서의 간사제 도입은 학생신앙운동의 역사와 사역의 연계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면에서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었다. 아울러 대학에서 학원 SFC의 활성화를 모색한 것은 학생신앙운동의 장을 확대하는 전기가 되었다. 간사제 도입은 강령에서 외치는 "학원 복음화"를 그야말로 모든 학원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되어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학생신앙운동이 이 시기에 명실상부한 학원 복음화를 위한 새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복음화"에도 동참하게 된 것이다. 1964년 1월 제46차 임시 위원회에서는 해외선교를 위한 모금운동을 결의하고, 이어 계속해서 총회선교부의 선교운동에 협력할 것을 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신앙운동은 이 기간에 학원, 국가, 세계 복음화라는 사명을 실천하기 위한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
6. 확장기(1972 ~ 1996)
학생신앙운동의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던 간사제도와 대학생 운동으로의 성장은 1972년 이후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간사 제도의 경우, 1972년 2월 제82차 정기위원회에서 각 지방에 지방 간사제도를 두기로 가결하고 부산지방 변의남 간사를 위시해 각 지방간사들이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간사들은 전임 사역자가 아니었고 1979년에 와서야 당시 진주지방 협동 간사로 있던 강영순 간사를 최초의 전임 간사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
이어 1980년에는 안용운 선배가 간사로 헌신하게 되고, 강영순 간사의 퇴임 이후 이성구, 전성준 간사가 헌신함으로 서울(안용운), 대구(전성준), 부산(이성구)을 나누어서 사역하는 전임 사역자가 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비로소 간사팀의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전임 사역자를 중심으로 한 간사팀은 1984년 오병욱, 강학근, 김수근 간사의 사역과 이듬회 간사공채 1기라 할 수 있는 안병만, 곽창대, 김희택, 김종선 간사의 사역 시작으로 더욱 강화 되어졌다. 이렇게 하여 서울, 부산, 대구, 경남, 전라, 충청지역이라는 새로운 지역 단위의 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각 지역별로 전임 사역자가 세워지면서 학생신앙운동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학원 복음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간사들은 이미 학생들에 의해 구성되어 활동하던 대학 SFC를 더욱 강화하고, 학원 복음화를 위한 본격적인 학원선교단체로 키워 가는데 주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 지역단위로 해서 대학 학생신앙운동 연합회가 조직되고, 학원 속에서 전도와 양육에 더욱 주력하게 되었다.
대학 학생신앙운동의 성장은 대략 네 가지 면에서 그 열매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대학 내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전도하고 그리고 대학이라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운동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또 자기 전공과 관련하여 학문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는 노력들을 감당하기도 했다. 특별히 1970~80년대 대학가의 분위기와 일반 학생운동에 대한 성경적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그 예로서 1989년에 결성된 대학 학생신앙운동 협의회가 중심 되어 펼쳤던 "대학문화 오적(五敵) 추방운동"을 들 수 있다.
둘째로, 1974년에 시작된 매년 개최되는 대학생 대회에서 나타났다. 대학생대회는 1972년 1월에 있었던 제29회 동기수양회부터 대학부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분리 운영해 오다가 아예 독립적인 대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대회를 통해 학생들은 성경과 시대를 보는 실제적인 훈련과 헌신을 결단했고, 전국에 흩어진 운동원 상호 간의 연대의식을 공고히 세워 갈 수 있었다. 이 대회는 해가 더하 갈수록 그 숫적인 면(1978년 395명, 1982년 700명, 1984년 850명)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회의 조직이나 내용면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오고 있다.
셋째로, 대학운동의 열매는 학원 속에서 전도와 양육을 위한 교과과정을 만드는 작업 속에서도 나타났다. 1986년에는 4년 8학기 교과과정이 나왔고, 이것은 현장 속에서 시행되고 수정되어 1992년에는 3단계 7과정의 교과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이 교과과정의 확립은 그동안 체계적인 양육 없이 운동이나 활동에 치중했던 학생신앙운동이 보다 균형 잡힌 학생운동으로 이끌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운동의 열매는 대학에서 양육받고 활동하던 운동원들 중에서 이 운동을 계속하고 후배들을 양육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평신도 간사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이런 평신도 간사들의 헌신은 안용운 간사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시작은 각 지역에 간사들이 사역하면서부터였다. 실제로 1986년 이후 그 수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
한편 대학 학원운동의 성장과 아울러 고교 학원운동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고교 학생신앙운동은 부산, 대구, 마산, 울산 김해 등지에 산재해 있었는데 지도자의 부재로 방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지역에서 사역하는 간사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고교 학원에 들어가서 전도하고 양육하므로 그 방향성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현재 교고 운동원 수에 비해 간사의 숫적인 면에 있어서나 체계화된 교과 과정의 완성도가 좀 뒤지지만 계속적으로 헌신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체계화된 프로그램 개발도 계속 되어지는 중에 있어서 전국적인 고교 학생신앙운동 구축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간사제도의 정착과 증가는 기존의 학생운동을 지원하고 체계화한 것 외에도 세 가지 특수사역 - 찬양사역, 출판사역, 해외사역- 을 가능케 했다. 찬양 사역의 경우 1980년대 말부터 마산의 브라가 찬양단을 필두로 대구의 예수노래, 진주의 새노래, 부산의 카리스 찬양팀이 사역을 하고 있다. 출판 사역은 출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큐티용 교재인 "날마다 주님과"를 비롯해 다양한 성경공부 교재뿐만 아니라 경건 서적에서 신학서적까지 출판하고 있다. 해외사역의 경우 매년 2월에 가지는 필리핀 단기선교 훈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미주 SFC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다른 선교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임간사가 각 지역에서 사역함으로 말미암아 학생신앙운동의 체계화와 연계성이 이루어졌으나 학생자발운동이라는 특성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 또 이러한 문제 대문에 1980년대에는 간사팀과 학생위원들 사이에 다소의 혼란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학생들은 학생들로서 해야 할 일을, 간사는 간사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잘 찾아 그 자리매김을 잘하고 있다. 간사들은 전문 사역자로서 학생운동의 나아갈 방향과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학생들은 전국위원회 조직을 통해 그러한 방향과 프로그램에 맞는 활동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간사와 학생이 상호보완적 관계 속에서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다.
한편 학원운동으로의 전환, 특별히 대학사역으로의 전환은 상대적으로 교회운동으로서의 학생신앙운동이 감당할 측면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중고등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역은 매우 취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전적으로 대학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라 교회 교육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신앙운동의 모든 간사와 위원들은 이 운동의 시작이 교회재건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의 성장이 교회의 지도와 후원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강령이 외치는 대로 개혁주의 교회건설이 이 운동의 궁극적 사명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인식 아래서 지금도 교회운동과 학원운동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러한 것은 학국 교회 내에서나 학원 선교단체들 속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바이다.
이 기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끝내기 전에 학생신앙운동 전체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느 수양회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전국학생신앙운동의 탄생이 수양회 기간 중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이후 '학생신앙운동은 수양회이다.'라는 등식이 성립할 만큼 수양회는 이 운동의 핵을 이루어 왔다. 실제로 위원회 기록을 살펴보면, 수양회와 관련된 것이 절반을 훨씬 넘고 있다. 이 수양회는 고려신학교가 주관했던 1948년 8월 2일부터 1주간 열렸던 수양회로부터 시작하여 1981년 1월까지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을 이용해 매년 모였다.
그러나, 1982년 1월 제144차 정기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전국의 중고등부가 모이는 수련회는 삼 년 간격으로 모이기로 했고, 그 첫 대회를 1983년에 갖기로 했다. 이 대회는 1983년 광주 정신여고에서, 1986년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1991년 덕유산 국립 야영장에서 그리고 1994년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대학생대회와 중고등부대회로 나누어서 열렸는데, 1991년과 1994년의 경우 모두 합쳐서 이만 여명이 참가하는 대집회로 모였다. 이런 대회를 통해서 학생신앙운동은 고신 학생운동으로서의 위상은 물론 한국 교회 전체에 있어서 그 위상을 굳게 세울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 학생신앙운동은 간사제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학생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학생선교단체로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확장은 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활동의 연장선에서 학원을 복음전파와 복음실천의 장으로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장의 확장은 강령에서 외쳤던 개혁주의 신앙을 실천으로서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영역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어야 하고, 복음 안에 있어야 함을 고백하고 실천해 보여 준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학생신앙운동은 여러 시기를 지나면서 성장하고 확장되어 온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조국교회 앞에 세워져 왔다. 작은 기도모임에서 출발하여 전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으로, 한 지역에서 전국으로, 교회만이 아니라 학원 속에서도 신앙운동하는 모임으로, 복음을 전하며 실천하는 모임으로, 한국과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모임으로 자라왔던 것이다. 이 운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온 세계와 영역 위에 선포하며 실천한느 운동으로 자라왔고 자라 갈 것이다.
국제복음주의학생연명(IFES)의 피터 로우만은 그의 저서 "The Day of His Power"라는 책 속에서 세계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살펴본 뒤에, 기독학생운동이 어떻게 운동해 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제언하고 있다.
(1) 기독학생운동은 전도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2) 기독학생운동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제자 양성 운동이 되어야 한다.
(3) 기독학생운동은 기도에 전념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4) 기독학생운동은 성경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5) 기독학생운동은 철저한 성경 연구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6) 기독학생운동은 효과적인 그리스도인 학사들을 배출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7) 기독학생운동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8) 기독학생운동은 선교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9) 기독학생운동은 생활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10) 기독학생운동은 창조적인 기독교 사상 및 문서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11) 기독학생운동은 학생책임에 위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12) 기독학생운동은 민족적 지도력에 위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언은 지난 50년 동안 학국과 학국교회 속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학생신앙운동이 세계기독학생운동과 직접적인 접촉이 별로 없었지만 기독학생운동으로서 얼마나 정도(正道)를 걸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성장은 결단코 학생신앙운동 혼자서 이루어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단 교회의 돌봄 가운데서 학생과 간사와 선배들이 함께 해온 결과였고,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아름다운 연합을 주선하고 주관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지난 50년을 이끌어 온 그 아름다운 연합이야 말로 이 운동이 새로운 50년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토양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50년을 세계기독학생운동에 의해 검증된 지난 50년에 대한 자부심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지니고서, 한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을 세계교회 속에 심어 가는 일일 것이다. 그 일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권을 온 땅 위에 충만하게 이루는 바른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 SFC의 영원한 외침이 이제부터 주 오실 날까지 들려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온 땅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