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신의 개혁주의 학원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 이 글은 1993년 발행된 "학생신앙운동 간사사역안내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 들어가면서
학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의 글이 한 사람의 견해로 집약되어져서도 안되는 일이며, 그럴 수도 없는 일인 줄 알면서 이 글을 써 나간다. 그러므로, 이 글을 발제로 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권위가 있으면서 공식적인 입장이 정돈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학신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원리를 가지고 지나간 역사를 다시 점검하고 평가하면서 미래에 대한 우리의 지향점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학신의 학생이나 간사나 지도위원이나 선배들이 어떤 좌표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되기 대문이다. 조금 더 엄하게 말하면, 자신이 이 사역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지침이 되고, 어떻게 자신을 갖추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런 유의 글은 한 개인의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조속한 시일 내에 권위적이며 공식적인 입장에서의 글이 나와야 한다.
2. 학신의 태동과 역사적 전통
학신의 태동에 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와 그것에 대한 반대 운동과 해방 이후의 회개 운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가 만주 사변을 기점으로 하여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정복의 야망을 키우면서부터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 문제는 교회에 있어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대부분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경우이지만, 많은 순교의 경험을 갖고 있었고, 개신 교회 역시 선교사들을 통해 받았던 신앙의 유산 또한 철저한 보수주의였기에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교회 내적으로 분열이 일어나고(사실 그 이전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소개로 분열의 징조는 있었다.), 강한 반대운동이 일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이 반대운동은 자연히 회개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회개운동은 교회 갱신운동이요,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신사 참배에 대한 가결은 한 개인이 사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공적으로 한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회개운동은 교회 차원의 운동이어야 마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회개운동과 교회 갱신운동은 신사 참배를 행했던 무리들에 의해 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반대했을가 하는 문제는 역사적이면서도 인간론적인 교훈이 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인격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그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회개운동은 강하게 일어났고, 특별히 경남과 부산 지역에서는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영향을 입은 일단의 학생들이 제일영도교회 사택(당시 한명동 목사)에 모여서 기도의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 때에 정한 3가지 방향은 '학업충실, 복음전도, 교회봉사' 였다고 한다. 이 모닥불은 1947년에 와서 '학생신앙협조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이와 비슷한 때에 한부선 선교사의 지도 아래 '청년신앙운동'이란 이름의 모임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제일영도교회에서 있었던 모임에 참여하던 멤버 중에서 이 모임에도 참여하는 자가 많았다. 이런 사실은 이 두 모임의 연대성을 쉽게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별히 이들의 연대성을 강하게 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매개체는 '고려신학교'였다. 1946년 남부총회(해방 이후 38선 이하의 남한 지역의 총회를 말함)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이 신학교는 일제 아래서 개교하고 성장해 왔을 뿐만 아니라 자연히 그런 가운데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된 교회 갱신운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뜻이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유주의가 팽배해 있었던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던 자들의 영향 아래 자유주의 신학의 산실이 되었다.
그래서, 1946년 9월 20일에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그 성격은 자연히 '조선신학교'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회개운동과 교회 갱신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 철저한 보수주의의 입장에 섰던 것이다. 자연 보수신앙의 계승과 이를 위한 인재 확보라는 측면에서 '고려신학교'와 위에서 언급했던 2개의 모임은 아주 잘 결합하게 되어졌던 것이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고려신학교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가져졌던 5번의 수양회였다. 이 후 강한 전도 운동이 부산지역 전역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그 수양회의 감화력과 여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 주는 단편적인 증가기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제일영도교회에서 모였던 '학생신앙협조회'는 1948년에 와서 '학생신앙운동'이름으로 모였는데, 그것은 단지 부산 지역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 모임이 1951년 7월 피난지 한복판인 부산 남교회에서 '제6회 전국기독학생신앙운동 하기 수양회'(이전에 고려신학교가 주축이 되었던 5차례의 수양회와 연결하여 6회라고 한 것 같음)를 개최하게 된다. 전국적인 규모의 집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625사변 와중으로 많은 국민이 부산에 몰렸기 대문이었다. 이런 모임은 여전히 1952년 7월 21일부터 28일 사이에도 있었는데, 7월 24일(26일)에 각 지방의 대표들이 모여서 전국 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로 모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글이 "이 폐허로 화한 땅덩어리 속에서도..."로 시작하는 '학생신앙운동 전국 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라는 표제의 글이다. 이 글은 학신의 탄생의 배경과 그 정신(적어도 의도)을 담고 있는 감동적인 글이다.
그래서, 우리는 잛지만은 이 글에 대한 평가를 해 보아야 한다. 이 글은 먼저 현실 감각과 역사의식이 있는 글이다. 그 당시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폐허로 화한 땅덩어리"와 "시련의 역사"로 인식하면서,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현실로 보고 있다. 아울러서 이 글에는 학신의 신학이 보수주의임이 나타난다. 홍해에서 출애굽 기사를 믿는 것에서 대표되어진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보수주의적이면서도 개혁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신의 이런 입장을 더욱 잘 정리해주는 글이 있다면 그것은 1953년 8월 21일에 제정된 '학신의 강령'이다. 초안을 박윤선 박사께서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강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혁주의이다. 조금 더 길게 표현하라고 한다면,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라고 하겠다.
강령은 가장 먼저 우리의 신학적 기반을 개혁주의적 전통 위에 설정한다. 이어서, 세상 속에서의 올바른 교회의 위치를 정의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위치에서의 학원과 국가와 세계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외치고, 복음화의 궁극적 목표로서 개혁주의 교회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의 원리를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밝힌다.
이런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라는 학신의 사상은 그 태동에서부터 학신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개혁주의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학신의 태동은 이러한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개혁주의적 교회건설이란 내적 순결을 견지하면서 외적으로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정돈될 수 있을 것이다. 학신이 그 태동에서부터 회개운동과전도운동에 열심했던 것ㅇ느 학신이 그 배경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라는 전통 위에 철저히 서 있었음을 증명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라는 사상은 학신의 태동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었다. 학신이 교회갱신운동인 회개운동의 와중에서 태동되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역사적 개혁주의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운동이었으며, 그러한 사상이었던 것을 상기해 볼 때, 학신의 태동을 개혁주의 속에서 찾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역사적 개혁주의는 교회 내적으로는 신앙적 순결을 유지함과 동시에 외적으로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측면에서 학신의 초창기에 강하게 일어났던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은 학신이 그러한 개혁주의 운동에 충실히 서 있던 것을 증명하는 단면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한 가지 해야 한다. '학신의 전통을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으로 보느냐, 아니면 개혁주의 교회 갱신운동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것은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이라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갱신 운동의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며, 특별히 해방 이후 1950년대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진 구체적인 한 운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이 선택을 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학신의 생명력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학신이 한국과 세계교회 속에서 보편적 신앙 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 깊이 관련이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제에 강하게 주장하고 픈 것은 학신의 생명력과 보편적 운동으로의 발전을 생각할 때, 학신의 전통을 단편적인 적용 운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원리적이며 역사적인 개혁주의 교회 갱신운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의 적용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학신의 성장과 전통의 적용
이상에서 간단하게 나마 보았던 대로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란 전통 속에서 태동한 학신은 조직을 갖추고 성장기(1954년)에 접어들게 된다. 학신의 성장과 관련해 특별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려파와의 관계와 수양회 개최와 그리고 학원 운동으로서의 정착이라는 문제이다.
1946년부터 일어났던 경남노회 문제로 급기야 1952년에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총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된다. 이 총노회를 이끄는 지도자 중에는 학신의 태동을 지도했던 한명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도 끼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경남노회 문제 중에 하나는 고려신학교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학신은 그 태동을 지도했던 지다자와의 관계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로 인하여 자연히 고려파와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학신, 지도자, 고려신학교, 그리고 나중에는 총노회와의 관계를 형성한 축은 명백하게 회개운동이었다.
1952년 10월에 총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된 이듬해 1953년 1월(전국학생신앙운동 제 2회 임시대회)에 가서 "본 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의 헌법을 준수하고 그 산하에 속한다."고 규칙을 개정하게 된다. 그 이전의 규칙을 찾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만 추측할 뿐이다. 분명히 총노회와는 상관이 없는 학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만, 회개운동이란 한국적 개혁운동과 그 지도자로 인해 학신은 고려파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재확인을 1959년(제10회 정기대회)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직속기관으로 두어 달라'는 청원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학신이 계속해서 회개운동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지도자와 지도력의 영행을 결단코 배제시킬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교회 문제와 사회문제를 혼돈되는 상황 속에서 한 가지의 사상과 전통 위에서 지속적인 운동을 이루어 가기란 학생들만의 능력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고 판단되기 대문이다. 실제로 1952년 전국 규모의 조직체로 출발할 때부터 지도위원장으로 한명동 목사를 선출한다. 이듬해 박윤선 목사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총노회 산하에 속하는 결정을 한 뒤부터는 선출의 방법보다는 총노회의 선임에 의해 지도위원이 세워지게 된다. 1954년 동년 3월 총노회 임사부는 학신의 문제를 다루게 되고, 임시 지도위원을 세우게 된다. 이 때 세워진 위원 중에 한명동 목사는 선두에 있었다. 이후 지도위원은 건임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사실은 1962년 승등측과의 합동 이후에 다시 확인되어진다. 1962년 제 14회 정기대회에서는 '총회 학생지도 목사님 선정에 의견을 반영하자'는 건이 나와 위원회에 일임하게 된다. 이것은 총노회와의 관계 이후 선출보다는 총회에서의 선임으로 지도위원이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우기 1962년의 결정은 승동측과 합동한 이후에도 그러한 관계를 지속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고려파에 속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1954년 1월 학신은 총노회 구제부에 보조금을 청원함(합동 이후 제32차 정기위원회 속회 결정에서도 이런 재정 청원건을 찾을 수 있다.)과 아울러 총노회의 노회 시찰구 단위로 13개 지방학신을 조직하게 된다. 이것이 학신이 총노회의 부속 기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63년에는 '8월 둘째 주일을 학신주일로 설정하기로 하고, 총회에 건의하기'로 했다. 1966년에는 '학신 주일을 설정하여 전국 교회가 학신을 위한 헌금을 해주도록 총회에 청원하기'로 했다.
이로 보건대 학신은 회개운동이라는 교회 갱신 운동과 지도자와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고려파와 관계를 맺게 되고, 총회의 한 부속 기관으로 정착하게 됨과 동시에 인적, 물적 지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파와의 관계는합동과 환원이란 한국교회의 대사건 속에서 더 분명히 찾아볼 수 있게 된다. 1960년 12월 13일 당시 승동측과 고려측은 합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합동은 불과 34개월 (1963년 9월 17일)만에 분리 환원하게 된다. 분리 환원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문제는 고려신학교 문제로, 신학교 일원 하냐, 단일화냐라는 논쟁 속에서 서울의 총회신학교 외에 부산의 고려신학교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는냐의 문제였다.
합동과 관련해 학신이 취한 결정 몇 가지를 살펴보자. 제 12회 정기대회(1961년 1월 9일)에서 규약 수정이 있었는데, "본 운동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산하에 있는 노회 단위로 조직된 지방 학신으로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11월 10일제 30차 전기위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산하에 있는 학생단체를 합동총회가 인정한 학생신앙운동으로 단일화해 주실 것"이라는 청원건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학생단체"란 합동 이전 승동 측에 있던 면려회를 말하는 것으로 기존의 고려측의 학생신앙운동으로 단일화한다는 결정이었다. 실제로 제 31차(1961년 1월 28일), 32차 정기 위원회 (3월 23일)에서는 이를 더 분명히 했다.
그러나 교단이 분리 환원된 직후 열렸던 제 44차 정기위원회(1963. 10. 25)에서는 학신의 진로를 장시간 토의한 끝에 투표로 합동총회와 환원총회 중 어느 한 편 총회에 속하기로 합의하여 7명 중 5명이 환원총회 학신 지도부의 지도를 받기로 가결하게 된다. 이로 학신은 환원 총회에 속하게 된다.
이후 합동 총회에 잔류하게 된 학신은 같은 강령을 가진 또 다른 공동체로 자기를 형성해 갔는데, 합동 측의 학신에 대해 우리는 합동 34개월 동안의 변신이었다고 하겠다. 즉, 면려회라는 형태의 학생단체가 34개월만에 학신으로 변신되어졌던 것이다. 한편, 학신과 고려파의 관계는 더욱더 굳건해지고, 명백하게 총회의 지도권 아래에 있게 된다.
학신의 태동이 수양회라는 현장에서 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후 학신의 성장 역시 이런 수양회를 통하여 구현되며, 어찌 보면 학신은 마치 수양회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학신의 유일한 사업처럼 여겨질 만하다. 1948년 8월 2일부터 고려신학교가 주관했던 수련회로부터 1991년 8월에 열렸던 '91 전국SFC하기 수련회(42회)'까지 거의 매년 열렸으며, 40여년 동안 학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지속적인 사건이 되어 왔다.
사실 이런 수양회는 1981년 1월까지는 매년 열렸으나, 1982년 1월 제 144차 정기 위원회 결과에 따라 '3년 간격을 원칙으로 하고, 그 첫 대회를 1983년에 갖기로 함'으로 그 동안의 수련회에 대한 반성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던 것이다.
수련회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새벽과 저녁 경건회를 비롯하여 중고와 대학부로 나눈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각종 대회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학신의 수련회는 단순한 신앙훈련을 위한 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교회문화와 교제를 위한 장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웅변대회, 토론대회, 전국기독아동현상 성경 암송대회, 전국기독학생 아동 음악경연대회, 친선 배구-탁구대회 등과 같은 프로그램이 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강의로 꾸며졌는데, 신학적인 주제로부터 시작하여 회사에 타나난 학생운동의 소고와 우리의 비전 이란 강의들은(비록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학신의 생각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학신의 수련회는 단순히 학신만의 행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수련회로 모이는 지방의 행사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들과 여러 단체들이 이에 협력했던 것이다. 각 교회에서 참석하는 학생들을 보조한다든지, 교단적으로 보조한다든지, 여전도회와 같은 데서 반찬류를 제공한다든지, 수련회 기간동안 모든 교회가 기도 후원하던 것은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한편 학신의 수련회와 관련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대학생 수련회'이다.그 시작은 1972년 10월부터 였다. 이후 매년 모이고 있는데, 이는 학신의 학원선교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학신이 학원선교운동으로서의 모습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나, 초창기부터 학원에 조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기에 학교에서 전도하교 교제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학원 내에서 조직적이고 독립적인 운동은 공식적으로1971년의 제 77차 정기위원회에서부터였다. 이 때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학원 SFC 문제에 관하여 1)불신자를 전도함에 있어 man to man으로 하기로, 2)학원 내에서 정기집회를 갖기로, 3) 사명있는 지도자와 SFC의 핵심 Member 확보키로, 4)재정적인 후원을 위해 이사회를 조직키로, 5)훈련된 Member를 본교단의 교회로 인도하기로 하다.
이후 1980년 132차 정기 위원회에서 '안용운 선배를 학원 담당 간사에 추대'함으로 학원을 담당할 전임자를 세우게 된다. 1983년 35회 정기대회를 앞두고 모였던 151차 정기위원회에서는 'U-SFC 대표들도 정기대회에서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갖는 것을 원측으로 하는 규약수정안을 채택하므로, 35회 정기대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학학신(U-SFC) 대표들이 학신의 맴버십을 갖게 된다.
이로부터 교회연합운동으로 시작한 학신은 명실상부한 학원선교단체가 된다. 현재 학원복음화협의회의 정식 단체이다. 사실 이러한 발전은 강령 구현의 당연한 결과이며,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좋은 발판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학원이란 국가 사회 뿐만 아니라 미래 교회의 가능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런 대학선교단체로서의 학신을 엮어주는 것은 대학생대회였다고 하겠다. 1972년 10월부터 매년 모이고 있는데, 그 주제는 대체적으로 교회와 학원과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이슈에 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76년의 제 3회 대학생대회(전국규모로의 3번째 대외인 것 같음)의 경우 그 주제를 'For Tomorrow - 무엇을 줄 것인가(교회, 학원, 사회)'로 정의하였던 것이 있겠다. 이외에서 1984년 대회에서는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선교대회식으로 구성했던 것은 이 대회의 폭들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학신의 수련회는 학신이 얼마큼 교회중심, 적어도 얼마나 지역교회와 깊은 관계 속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아울러 학신이 그 가열ㅇ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전포괄적인 개혁주의를 훈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학신의 조직이 교회와 학원으로 확대되어져 가고, 특별히 대학선교단체로서의 위상을 굳혀감에 따라 원거리에서 지도하던 지도위원들과는 달리 직접적인 지도를 해줄 간사를 요청하게 되어진다. 1967년 60차 위원회에서는 'SFC 전담 간사는 재정적인 문제로 보류한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는 적어도 그때부터 간사에 대한 요구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간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71년부터 였다. 1971년 10월의 79차 정기위원회 참석자 명단에 김만우 간사가 처음으로 등장.
이후 82차 정기위원회(1972.2.24)에서 '각 지방마다 지방 간사 제도를 두기로 가결'하게 된다. 이후 변의남(부산), 강용원(경기), 윤현주(경동)와 같은 분들이 지방간사로 세움을 받는다.
그러나, 1977년의 119차 위원회에서 '풀타임 간사제'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까지의 간사직은 교회사역과 함께 수행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됨으로 학신은 지도위원과 간사, 그리고 학생이라는 성원을 그 조직 속에 품게 된다.
이상에서 논의한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학신이 그 전통을 실천, 적용해 갔던 것에 대해 몇가지 평가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학신의 앞날을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학신의 고려파와의 관계'는 학원이란 선교현장에서의 학신의 사역에 좋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개혁주의라는 노선을 유지하도록 했던 보수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이 한편으론 학신의 이미지를 제한시키는 것이 되어서 보편적 선교단체(범교단적 선교단체)로서의 이미지를 갖거나 보여주는데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고려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고려파 교회와 학신이 쌍방간에 교단성이 아니라 개혁주의란 신앙을 고백으로 그 관계를 정돈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진다. 고려파 교회는 학신을 개혁주의 야전군으로서 지원과 지도를 하고, 학신은 학신대로 그 신앙고백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학신은 개혁주의 신앙고백 위에서 타교단과의 관계 형성에도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협동 간사 중에는 합동 측 교회에 출신이면서 계속하여 그곳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숫자는 늘어날 것 같다. 물론 이럴 때에 개혁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적어도 개혁주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노력은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학생운동이란 한계 때문에 그 하나됨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신앙고백적인 측면과 한국사회와 선교를 위한 교회 역할에 있어서는 하나됨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신의 훈련장으로서의 수련회의 역할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련회가 지속적으로 거의 고정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져 온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으나 변화하는 사회와 그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훈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아울러 학원선교단체로서 성장하는데에 필수적인 양육이라는 측면에서는 재고핼 문제가 많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발전이나 진보가 없는 주제나 단계별로 체계화되지 못한 프로그램 운영에서는 더욱더 그렇다고 하겠다.
결국 이런 수련회의 운영은 역사적 연속성을 생각하면서도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 역할을 강조할 수 있는 지도력과 비전 제시의 문제에 귀착된다고 하겠다. 여기에 간사 사역의 단명과 단절의 역사와 비전문성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수련회가 학신의 신앙고백인 개혁주의를 제대로 훈련하는 장이 되고 연속성과 단계적 체계화를 유지하는 양육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구성하는 지도위원이나 간사가 그러한 입장에 굳게 서야 하며, 그러한 입장에서 제시된 비전이 철저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은 사역의 전문성과 장기사역이 뒷받침될 대에 비로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4. 학신의 미래를 위한 과제
학신의 미래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역사에 충실하면서 강령구현에 더욱더 전력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로 하여금 성경적 개혁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운동과 게셰를 향한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교회일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세계 속에서 그러한 교회 운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신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 앞에서의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에서 교회와 세계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여기에 우리는 성경공부와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한국 사회와 세계 분석작업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경주함에 있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구령사업에 두어야 할 것이다.
훈련을 말함에 있어 훈련의 장과 훈련의 방법은 참으로 중요하다. 먼저 수련회는 기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아침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오전은 성경공부로, 오후 시간은 시계 문제로, 그리고 저녁 시간은 종합적인 주제와 헌신으로 하루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적인 골격 속에서 구체적인 주제와 내용은 그때마다 확정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수련회가 하나의 양육장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몇년 단위로 수련회의 단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고, 기존의 양육과정이 수련회의 심화 과정이 되도록 하는 등 상호 연계성을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부와 작업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할 것이므로 운동을 위한 프로그램과 전략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학생이 할 수 있는 것과 졸업한 동문이 해야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적인 것인지 지속적인 것인지에 대한 고려도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 속에서 그러한 일들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해외선교와 협력하는 학신 선교상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천적인 항목은 매년 혹은 일정 기간을 단위로 발표되어야 할 것이다. 전국단위 수련회나 정기 대회를 폐회할 때와 같은 의미있는 기회를 이용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번의 모임에서 그 실천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지도위원과 간사의 지도력이 대단히 중요한 요인을 형성하게 되있다. 무엇보다도 지도력은 개혁주의에 대한 바르고도 철저한 이해를 포함해야 한다. 특별히 개혁주의 특성인 전포괄적인 전우주적인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전포관적인 이상 때문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능력과 직분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전체적인 이상 아래에 그러한 다양한 능력과 직분은 각각 명분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지도력은 그러한 연합을 학신의 전체적인 이상 아래로 ㄹ잘 모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직능별 간사제도는 아주 유용할 것이다.
한편, 학신의 이상을 생각할 때 학신에게 있어야 하는 능력이나 직분이 필요할 때, 간사들이라도 그런 것들을 채워 줄 수 있는 훈련의 장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지도력은 전체적인 안목 속에서 간사들을 그러한 훈련의 장으로 배치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학신의 역사와 정신을 언급함에 있어서 거론해야 할 것들이 여기에 언급되어진 것 외에도 아주 많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자료는 주로 '학생신앙운동 20년사'과 '학생신앙운동 40년 사료'와 같은 회의록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많은 제한이 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