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83년에 발간된 『학생신앙운동의 이념과 실제』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I. 배아기(1945.8~1946.9)
1945년 8월 15일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본 태양신의 탄압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영적인 출애굽이라 할 것이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은 신교, 특히 장로교회에 극심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구교는 무조건 수락하였으나 신교는 결사 반대하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이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는 무기휴학을 선언하고 무저항의 항의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각 교파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기독교단에 소속되어 버렸다. 뜻있는 신도들과 종들은 투옥되고, 교회는 폐문당하고,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지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모두 함께 하나님의 전으로 모이는 날이었다. 한국 교회는 36년 일본 태양신의 세력에 의해 무너진 마음의 제단을 다시 샇아야만 했고 세속화되어버린 교리를 말씀 속에서 다시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조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울어야만 했다. 해방과 함께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새로운 역사적 과업을 치뤄야 할 해산의 부르짖음을 발해야 했다. 이러한 해산의 부르짖음은 첫째, 신앙 양심에서 볼 때 회개였다. 한국 교회의 공죄와 신사참배를 솔전수범하고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을 만드는데 공헌한 교직자의 선동 등은 분명히 회개할 일이었고 또한 양 떼들은 무분별과 추종을 회개해야만 했다. 둘째, 신학 상으로 볼 때 신학교 설립이었다.
평양신학교가 폐문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신학교 설립 기성위원회가 있었는데 새 신학 설립 위원들의 성분은 자유주의 신학을 입수하여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사상에 도전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1940년 4월에 서울에서 개교를 보았던 "조선신학원"이었다. 해방이 될때까지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의 그늘 아래 성장하여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남부총회가 이 신학교를 총회 직영학교로 인준 가결하였다. 이 결정은 내용적으로 한국교회가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향하는 자들의 학교를 수락한 셈이었다.
그러나 항도 부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1946년 9월 20일에 개교를 선언하게 된 "고려신학교"이다. 초대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했으며, 개혁주의 신학과 생활을 확립하므로 전 평양신학교의 정통을 계승하고 해방 후 자유주의 신학에 고명하는 조선신학교와 선한 대결을 하여왔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러한 해산의 부르짖음 속에서 회개와 개혁주의 신학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산실에서 출생시켰다. 학생신앙운동은 위와 같이 20세기 말엽의 극동 아시아 지역에 일본 천조대신의 정교 탄압의 압제 아래에서 출애굽 한 선배를 따라 한국의 미스바로 모여서 거기서 해산하는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의 운동이 소리 없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II. 형성기(1946.10 ~ 1952.6)
1. 학생신앙 협조회
학국장로교회에 필연적인 역사적 사실로 요청된 교직자와 평신도 간의 회개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가슴에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기독학생들로서 할 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저들은 제1영도교회 한명동 목사 사택에서 몇몇 사람이 자리를 같이해서 기독학생의 사명의식을 새롭게 재인식하게 됭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하나님께 우리도 기도를 하지. 시간을 정하고 목적을 정해서 기도하자."는 것에 마음을 뭉쳐서 매 토요일마다 이 사택에서 기도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첫 번째의 기도제목은 학업충실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불신학생 보다 주어진 과목에 더 우수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고 또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들은 학원의 복음전도에 뜻을 모았다. 믿지 않는 친구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싶어서 입으로, 행동으로, 학교 봉사로, 실력으로 모든 면에 본이 되어 복음전도자의 사명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회 봉사에 착안하였다. 지극히 작은 이레 충성하는 밀알운동으로 몸을 바쳐 주님의 교회에 봉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마음과 몸과 뜻을 모아 주님께 바치는 작은 모닥불이 되어 불붙기 시작했는데 이 모닥불의 이름은 1947년에 와서 "학생신앙협조회"라 호칭되었다.
2. 청년신앙운동
1946년 초부터 YMCA회관에서 청년신앙운동(YFC)이라는 이름으로 한부선 목사를 중심하는 월요모임이 있었다. 이 청년신앙운동은 학생신앙협조회와 함께 일어난 두 모닥불 운동이었다. 이 모임은 부산 청년신앙운동으로 불리워졌고 학생신앙협조회 출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3. 학생신앙운동의 산실 고려신학교
1946년 9월 20일에 개교를 본 고려신학교는 진해 경화동 신학강좌에서부터 부산진의 일신여학교 교사로, 다음에는 초량교회 유치원 건물로 이전 후 부산시 광복동 1가 7번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생수는 70~80명 정도였으나 진리운동의 봉화를 담은 거룩한 그릇이었다. 고려신학교가 학생운동의 산실이 된 이유는 고려신학교가 진리운동의 바른 정신 계승을 위하여, 신학교 운동에 보다 훌륭한 인재들을 입학시키기 위하여, 신앙운동의 힘의 집합을 위하여 중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신학교가 주최하는 기독소년 하기 수양회(1948년부터)를 전후하여 불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회개와 기도 그리고 전도의 불길이었다.
III. 발단 및 조직기 (1952.6 ~ 1954.8)
1. 해방 후 한국 기독학생운동의 모습들
교회 지도자들은 해방 전 각 교파별 청년, 학생운동을 폐지하고 "한국기독교청년회"라는 초교파적인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8년에 이르러 각 교파 환원운동이 일어나고 1949년 5월 경에는 자기 교파 이름 아래 각각 나뉘어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기독학생협의회(KSCC)는 강원용 씨의 지도 아래 강력한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신학적인 배경은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기독학생회는 장로교 총회 면려청년회의 지도하에 황성수 씨의 영도 아래 일어난 학생단체인데 이 단체의 성격은 이합집산적이었고 신학적인 비전이 없이 초교파적이었다. 그 외에 YMCA, YWCA 등의 학생단체가 있었다.
2. 학생신앙운동(SFC)의 발단과 그 특질
기도회 모임에서 처음에 학생신앙협조회라고 부르다가 1948년 학생신앙운동이라고 명칭을 한정한 것이 이 운동의 역사적 기원이다.
운동 발단의 몇가지 특징을 살펴본다면,
첫째, 신앙적인 자발심에서 출발되었다. 이 운동은 총회, 노회, 어느 특이한 영도자, 외국 선교단체 등의 사전권유나 계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타 교파와의 대립관계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 운동은 시대적인 회개 운동에 동참한 나머지 피 끓는 학생들의 단순한 신앙생명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발로 한 것이다.
둘째, 신앙의 자립이다. 개인 개인의 신앙인격 즉 중생체험이 이 운동의 특질이다. 결코 이타적인 신앙생활은 아니었다. 오직 "네 발로 일어서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자기 발로 일어나 걸어가는 운동이다. 이것은 기도의 자립, 예배의 자립, 봉사와 전도의 자립이었다. 그리하여 학생 자신들의 여가를 이용하여 기도회, 성경연구, 토론회, 학교별 전도운동, 강연회, 연합예배, 교회봉사 등에 그 창의성을 발휘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자립 즉 신앙의 자립을 말한다.
셋째, 순수한 기독학생운동이다. 내일의 성원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수입하는 학생들의 운동이다. 여기에 진보가 있고, 연구가 있고 발전과 향상과 꿈이 있다. 온갖 약동과 활력이 솟고 폭발적 잠재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넷째, 순수하게 신앙운동만을 본질로 한다. 이 운동에는 어떤 정치적 색채가 가미되어서는 안된다. 대외적인 우호관계를 그 우선순위에 두어서도 안된다. 다만 배우는 학생으로서 자신의 신앙확립과 불신 동료의 영혼을 탐내어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 운동은 순수한 한국적인 기독학생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 조국에서 피어난, 이 조국을 위한 운동이었다.
3. 학생신앙운동의 조직
학생신앙운동으로 성격이 들어난 이 운동은 부산에서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대구, 울산, 경주, 서울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했다. 1951년 7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난지의 부산 남교회에서 부산학생신앙운동 하기 수양회가 모여졌는데, 이 모임이 전국학생신앙운동의 본격적인 출범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주최는 부산학생신앙운동이었으나 해마다 모이는 이 수양회는 그 구성이 전국적 규모로 확대된 것이고, 이 수양회 중 7월 24일 밤예배 후 수양회 사무실에서 각 지방 대표가 모여 의논한 결과 학생신앙운동 조직 준비 위원회를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전국학생신앙운동은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라는 포제 아래 그 첫소리를 다음과 같이 발하였다.
"이 폐허로 화한 땅 덩어리 속에서도 새 생명은 움직인다. 조죽과 교회의 현실을 보고 비관하고 물러 설 자는 물러서라. 그러나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 앞에서 살리신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있다. 이제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리리니 신앙 동지여, 굳게 일어서라. 하늘로 귀를 기우리라. 참된 주의 음성을, 피로 짓밟힌 이 제단과 피로 물들인 조국의 가슴 속에 전할 자 누구냐.
사랑하는 신앙동지여 실로 내 자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과거 6년간 아무 소리 없이 이 생명을 위한 운동을 주의 은혜로 이루어 왔다. 모든 기독학생운동이 큰 환란과 싸움 속에 휩쓸려 허수아비같이 사라졌을 때라도 우리는 주의 믿음과 열로 이 시련의 역사를 승리로 굴복시켰다.
동지여, 이제 우리는 전국대회의 필요를 필연적으로 확신한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란 이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 속에 전능과 능력과 섭리로 역사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의인 열 사람, 이는 소돔 고모라가 필요로 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이 슬픈 조국의 제단에는 한 사람의 제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아! 실로 한심한 조국의 제단이 아니었던가.
동지여, 우리는 철석같이 믿음과 힘과 열로 단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 전국대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파숫군, 그리스도의 전달자, 죄와 세속주의와 권력에 타협 않는 아 - 실로 비참한 암흑 천지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 동지여, 굳세게 믿음으로 일어서라."
이와 같이 학생신앙운동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가슴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하나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이제 새삼스럽게 조직의 필요를 절감한다고 소리 질렀다. 선 조직 후 운동이 아닐, 선 운동 후 조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자는 하나님뿐이시고, 발단적인 원인은 순교자적 정신이었다. 1952년 7월 26일 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 제1회 준비위원회가 이원홍 씨(현, 한국방송공사 사장)의 사회로 모여졌는데 이들은 전국학생신앙운동 기구조직에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이 운동에 한명동 목사는 주로 조직 면에서, 한부선 선교사는 전도 면에서, 박윤선 목사는 신학적 훈련에, 전영창 선생은 협동총무로 실무에서 그 주역을 맡고 해산의 수고를 담당하였다.
IV. 성장기 (1954.8 ~ 1963)
1. 지도체제
학생신앙운동은 선 운동, 후 조직 이었으므로 사전에 뚜렷한 지도체제가 설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에 와서도 SFC 지도의 문제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이 운동의 시발기에는 지도위원장에 한상동 목사, 부위원장에 전영창 선생을 추대하고, 다음에는 박윤선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지도를 받아 오다가 1953년 8월 제3회 전국 SFC 정기대회 시에 지도위원 추대 문제는 총회에 위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3월 12일부터 모인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에 당시 SFC 위원장 배경재 씨가 총회장 앞으로 "전국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을 총회에서 위촉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낸 결과 본 교단 총회에서는 상비가 아닌 "학생지도위원"이란 특별부서를 두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총회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학생지도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이것은 본 총회가 학생신앙운동을 공인하는 법적기관이 됨과 본 교단 학생운동의 단일화를 의미하는 의의를 띄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의 성격은 "뒤에서 밀어주는" 지도원리를 택하였다.
2. 활력소인 수양회
학생신앙운동은 모임 가운데서 활력을 찾았다. 두세 사람의 기도회 모임에서 마침내 전국학생신앙운동 수양회로 번져갔다. SFC 활력소로서 수양회는 아래와 같은 SFC 성장의 의의를 띄고 있었다.
① 중생체험의 적기인 중고대학생에게 강력한 영적 체험의 기회가 되므로 새사람 운동에 힘이 되었다.
② 집단적인 신앙수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새 사명의식에서 분발케 하였다.
③ 연합적인 모임을 통하여 뜨거운 성도의 교제를 체득케 하였다.
④ 흩어진 학도들로 하여금 종합적인 수련을 통하여 우리의 갈 길과 영적 긍지를 함양시킴에 기여하였다.
⑤ 받은 은혜체험을 통하여 어릴 때부터 교회봉사와 국가봉사에 앞장서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⑥ 각 지방과 학교에 전도운동의 붐을 조성시키므로 사람 났는 어부의 재미를 보게 했다.
⑦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단 발전의 비전을 불러 일으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다지도 큰 의의를 지닌 수양회의 약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 | 때 | 장소 | 모인수 | 표제 |
1 | 1948.8.8 ~ 7 | 고려신학교 | 155 | 없음 |
2 | 1949.1.11 ~ 16 | " | 196 | " |
3 | 1949.8.3 ~ 9 | " | 202 | " |
4 | 1950.1.9 ~ 14 | " | 144 | " |
5 | 1951.7.23 ~ 29 | " | 350 | " |
6 | 1952.7.21 ~ 28 | 부산남교회 | 236 | 고난의 의의 |
7 | 1953.1.5 ~ 10 | " | 351 | 영광은 하나님께 |
8 | 1954.1.5 ~13 | " | 556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9 | 1954.8.3 ~ 11 | " | 900 | 충성된 증인 |
10 | 1955.1.4 ~ 11 | " | 752 |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
11 | 1955.7.28. ~ 8.3 | " | 499 | 세상의 소금 |
12 | 1956.8.7 ~ 13 | 고려신학교 | 407 |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
13 | 1956.12.28 ~ 1.3 | 서울충현교회 | 200 |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
14 | 1957.12.31 ~ 1.6 | 부산남교회 | 315 | 우리의 살길 |
15 | 1958 | " | 222 | 주와 함께 |
16 | 1959.1.7 ~ 13 | 대구성남교회 | 225 | 내 주여 뜻대로 |
17 | 1960.1.6 ~ 12 | 진주교회 | 479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18 | 1961.1.5. ~ 11 | 대전중앙교회 | 433 | 처음 사랑을 찾자 |
19 | 1962.1.18 ~ 24 | 대구서문교회 | 1.066 | 젊음들아 어이할꼬 |
20 | 1962.8.16 ~ 23 | 서울승동교회 | 1.336 | 성경으로 돌아가자 |
21 | 1964.1.9 ~ 14 | 부산남교회 | 496 | 새 역사를 향해서 |
22 | 1965.1.7 ~ 12 | 마산제2문창교회 | 511 | 보라 여호와의 깃발을 |
23 | 1966.1.10 ~ 14 | 경주교회 | 370 | 네가 선 땅은 어디냐? |
24 | 1967.1.11 ~ 16 | 거창교회 | 412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
25 | 1968.1.11 ~ 16 | 대구서문로교회 | 761 | 땅을 정복하라 |
26 | 1969.1.9 ~ 14 | 부산남교회 | 883 | 내 주는 강한 성 |
27 | 1970.1.8 ~ 14 | 진해남부교회 | 775 | 주 마음 본받는 자 |
28 | 1971.1.4 ~ 9 | 부산삼일교회 | 1.303 | 네 장막터를 넓혀라 |
29 | 1972.1.6 ~ 12 | 부산남교회 | 1.319 | 새 술은 새 부대에 |
30 | 1973.1.11 ~ 17 | 서울성원교회 | 765 |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을 발하자 |
31 | 1974.1.17 ~ 23 | 대구서문로교회 | 1.100 |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
32 | 1975.1.9 ~ 16 | 거창교회 | 내 민족을 가게 하라 | |
33 | 1976.1.22 ~ 28 | 고신대, 송도제일교회 |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 |
34 | 1977.1.17 ~ 22 | 성원, 중앙, 서문교회 | 1.530 | 제자를 삼아라 |
35 | 1978.1.24 ~ 28 | 가야성안, 연지, 수영교회 | 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
36 | 1979.1.23 ~ 27 | 서문로, 성동, 대구서교회 | 자는 자여 어찜이뇨 | |
37 | 1980.1.21 ~ 25 | 고신대, 제1영도, 제4영도교회 | 2,857 | 일어나 함께 가자 |
38 | 1981.1.19 ~ 23 | 거창고등학교 | 1,400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39 | 1982.1.12 ~ 15 | 대전생수기도원 | 너희 묵은 땅을 갈고 | |
40 | 1983.8.1 ~ 5 | 경신여고, 광주신학교 |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
3. 창조를 위한 몸부림들
① SFC 뱃지 보급 : 1965년 전국대회 시에 새로운 각성을 분발시키기 위해 SFC 뱃지를 만들어 운동원들에게 보급하므로 우리 운동의 정신무장을 상징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문서활동 : 1953년에 "학생신앙운동"이라고 하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기독교인의 자세 등을 전국에 보급하고 우리 신앙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후에 파수군지에 SFC란을 설치하여 활동하다가 제11회 대회 시에 SFC 기관지를 발행키로 결정하고 이 운동의 활동을 문서로 연결하여 오늘의 "전국학신보"에 이르고 있다.
③ SFC와 국제관계 : 주체적인 입장에 있는 SFC는 SFC 선배와 교포 2세로 구성된 해외 SFC들이 미국, 중국, 구라파 등에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④ 전도운동 : 각종 수양회시에 노방전도, 축호전도, 그룹전도, 지방별 정도 등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⑤ SFC회관 설립 및 자립기금 문제 : 1962년 13회 정기대회시 SFC 회관 설립을 위하여 연구키로 하고,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해마다 적금 중에 있다.
4. 합동총회와 SFC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역사적인 장로회 합동식이 거행되었는데 이것은 SFC에도 크나큰 의의를 싣고 왔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한국 보수교단의 일대 전진이었다. 총신 측에는 통일적인 학생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고신 측의 SFC운동을 합동총회에서 그대로 승인하였다. 대전에서 모였던 제18회 동기수양회는 3주 전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가 있은 후 양측 총회의 학생이 처음으로 모여지는 장소였다. 그러나 합동 이후 3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에, 일부 총신 지도자들과 각 지방 학생 대표만이 모일 수 있었다. 수양회 기간 중에 모인 제12회 전국 SFC 정기대회는 총신 측 학생과의 합동의 길을 열어놓기 위하여 SFC 규약을 수정하였고 1961년 3월 22일 오후 7시 30분 대구 서현교회당에서 속회대회가 한명동 목사의 설교로 개회되어 쌍방 합동대회가 성공리에 마쳐졌고 그 후에 이 운동은 새로운 기운으로 전국 각지에 뻗어나갔다. 특기할만한 사실로 그 이듬해에 대구 서현교회당(1962.1)과 서울승동교회당(1962.8)에서 모인 수양회는 새로운 붐을 이루었다. 한국 어느 단체에서도 볼 수 없는 크고 강한 힘으로 돌진하여 한국과 아세아와 세계를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전진을 기하였다.
V. 전환기(1963.9 ~ 1970)
1960년 한국교회(보수)는 합동한지 만 3년이 채 되지 못해 또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SFC도 역사적 기록에 수양회를 모일 수 없는 비극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상황은 제21회 전국 SFC 하기수양회를 연기하는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총신과 고신이 다시 분리된 이후 양측 교단은 꼭 같은 학생신앙운동을 존속시키고 있는데 합동하기 전에는 총신 측에 SFC가 없었으나 분리된 다음에는 SFC를 그대로 존속시켰고, 보호육성면에 있어서 고신 측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훨씬 적극적인 자세였다. 현재는 총신 측 SFC는 SCE로 개칭하여 SFC는 우리 만이 가지는 유일한 단체가 되었다. 총신 측 SFC의 경우는 고신 측으로 환원하지 않았던 교회와, 고신출신 SFC 선배들의 공헌이 지대하였다. 고신 측의 경우 SFC는 환원 이후, 초창기의 방법에서 답습된 권태감과 전문적인 지도자가 없는데서 사기면에서 많이 수축된 상태에 이르렀다.
1969년 제19회 총회는 SFc 주일험금 청원을 받아 재정부 일반예산에서 지출토록 결정하였고 제20회 총회는 전국 SFC를 위하여 11월 첫 주일을 SFC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헌금하여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제21회 총회에서는 매년 10월 둘째 주일을 SFC주일로 정하고 헌금하여 주도록 결정하므로 SFC에 대한 총회적인 관심과 지원도를 더 높여 주었다. 현재 SFC 주일은 10월 넷째 주일에 지키고 있다.
VI. 70년대
SFC가 정식 출범한 1948년 이후 3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SFC는 많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난 1970년대를 회고해 볼 때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시기야 말로 SFC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시행착오도 많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새로운 방향 모색을 위해서 몸부림쳤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다음 세 가지로 그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봄으로써 1970년대의 SFC가 걸어온 길을 회고해 보기로 하겠다.
1. 간사제도의 도입과 정착화
1970년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간사제도의 도입과 정착화이다. 간사제다가 SFC에 도입되기 전에는 협동총무제도나 명예위원장 제도를 통해 선배들이 간접적으로 후배를 도우는 방법을 택해왔고, 또한 총회에는 SFC를 지도하는 기구가 계속 있어 오기는 했으나 넓은 의미에서의 방향제시 정도에 그치고 SFC의 세밀한 면까지를 지도할 시간과 여건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SFC에 간사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58년 7월에 있은 제9회 정기대회 때부터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미루어져 오다가 1971년 비로소 Full-time의 간사는 아니었으나 김만우 목사(당시 전도사)가 도채 간사에 취임함으로 새로운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 간사제도를 도입한 의의는 다음 세 가지 면에서 강조되어야 할 줄 안다.
첫째는 SFC운동의 연속성을 위함이다. SFC위원의 임기는 1년이기 때문에 일을 파악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겨우 우 일을 파악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 일으 채 이루지도 못하고 임기가 끝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대에 넘겨주면 다음 위원들도 앞의 전철을 밟아야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힘겹게 동기 수양회를 치르는 것으로 임기를 마치는 것이 현실이었고 따라서 장기적이고 지속성 있는 일을 추진해 나가기는 어려웠다. 이런 시점에서 간사제도의 도입은 SFC의 장기적인 계획과 그 추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다.
둘째는 학생운동의 전문화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학생운동과 학원선교, 그리고 학생지도는 임기응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문적인 자질과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전문적인 연구와 계획을 통해 운동을 힘차게 추진 시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학생 스스로의 힘으로 마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간사가 담당하므로 SFC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SFC는 간사 제도의 도입을 환영하였고 또한 그 의의가 크다하겠다.
그동안 SFC 간사를 역임한 분은 김만우, 변의남, 최학량, 장희종, 강영순, 제씨 등이며, 현재는 이성구, 안용운, 전성준 간사가 총회의 인준을 받아 일하고 있다. 또한 많은 간사 후보자들이 이 일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 간사제도가 도입되었을 대는 여러 가지 운용상의 미숙으로 인해 간사 재직 기간이 짧았고, 또한 간사 교체가 잦음과 거기 따른 지도자의 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SFC운동이 연속성보다 단속성을 겪은 일이 있기도 했으나 현재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가사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한 제반노력이 모여지고 있다. 또한 최근에 SFC지도를 위한 총회의 상설위원회가 구성됨으로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2. 대학생 중심 운동에로의 전환
1960년대까지 SFC운동이 중고등학생 중심이었다면 1970년대는 대학생 중심으로 변화된 시기라 말할 수 있겠다. 이런한 현상은 다음 몇 가지 현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72년 1월에 있었던 제29회 동기수양회부터는 저녁집회는 함께 모이고, 그 외에 모든 프로그램은 대학부를 분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77년 수양회(34회)부터는 모든 대학부의 프로그램을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리고 1974년 4월 4 ~ 6일에 서울 YMCA캠프장에서는 제1회 대학생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후 매년 개최되어 1982년 여름에는 제9회 대회를 성황리에 치렀으며, 그 참석자는 700여 명 이상으로 나타났다. 이 모임은 대학생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SFC 운동에 활력을 주는 귀한 모임으로 계속되었다. 가간의 대학생대회의 개관은 다음과 같다.
회 | 때 | 곳 | 모인 수 | 표제 |
1 | 1974.4.4 ~ 6 | 서울 YMCA 캠프장 | 90 | 내일을 위하여 |
2 | 1975.8.12 ~ 15 | 대구 주암산기도원 | 내일을 위하여 - 역사, 교회, 사회가 요청하는 기독학생상 | |
3 | 1976.8.17 ~ 20 | 밀양 긴늪 | 100 | 내일을 위하여 - 무엇을 줄 것인가 교회에, 학원, 사회에 |
4 | 1977 | 하동 송림 | 90 | |
5 | 1978.7.18 ~ 21 | 안동 백운정 | 150 | 우리의 영역을 주님께 |
6 | 1979.7.16 ~ 21 | 송남 해수욕장 | 395 | 온 세상 위하여 |
7 | 1980 | 함양 대남교회당 | 100 | 성령이 임하시면 |
8 | 1981.7.14 ~ 18 | 전남 야영장 | 350 | 일어나서 칠지어다 |
9 | 1982.7.13 ~ 17 | 경북 청천다락원 | 700 | 회개하라 처국이 가까왔는니라 |
10 | 1983.8.1 ~ 5 | 광주 경신여고 |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
그리고 대학 SFC들이 활발히 조직되며, 학원담당 간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70년대 후반기의 일이었다.
3. 새로운 이념의 정지작업
1970년대 이전의 SFC는 한 마디로 동기수양회 중심이었다. 그러나 1070년대에 들어서면서 SFC는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이념의 정지작업을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부산 동래수양관에서는 제1회 SFC 지도자 수련회가 모였는데, 이 모임은 SFC 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우리의 사명과 내일의 좌표"라는 주제로 모인 이 모임은 SFC 강령 해설, 복음화전략, 학원프로그램, 타기독학생단체연구 등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다. 그 후 지도자 수련회는 1972년 경주, 73년 대구, 74년 부산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후에는 각 지방별로 분리 실시 되기도 하였다. SFC 활동의 핵심이 학원선교롤 바뀌어 짐에 따라 SFC 운동의 요원화, 핵심 멤버의 훈련 등이 그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각 학원에 SFC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각 지역별 대학생연합회가 조직되었고, 학원 담당 간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현제 조지괴어 있는 대학 SFC는 37개교에 달하며, 고교 SFC는 부산에만 하도 45개교에 조직되어 있다. 지난 83년 5월에는 대학 SFC 지도자들이 서울에서 모여 구체적인 논의를 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상과 같은 주요한 특징 이외에, 70년대 후반기부터 동문운동이 구체적 성격을 띠고 활성화 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70년대 이후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보면 동기수양회에 모이는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그 조정이 불가피하여져, 동기수양회는 각 지방별로 모이고, 매 3년에 한 번씩 모든 운동원이 모이는 전국대회가 모여지게 된 것이다. 또한 캠프장 건립과 관련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가고 있다. 경북지방에서는 81년 11월 경북지방에 전담간사가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그동안 논의되어 오던 SFC 하우스 마련을 위하여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고, 동문, 현역의 헌금으로 83년 3월에는 SFC하우스를 구입하게 되었다. 앞으로 SFC는 많은 전담간사의 확보와 훈련 그리고 핵심요원 훈련을 위한 SFC훈련원의 설립, 신분 발간, 교육 및 양육교재 발간 등 중요한 일을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