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빈주의 신학 이념의 전제
「현대의 궁극적 문제는 신학 문제이다.」 고 한 저 유명한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의 말을 기억한다.
한국에 있어서 학생신앙운동은 해방후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신학 투쟁에 동참하게 되었다. 혹자는 이 소리를 비난하여 배움의 길에 있는 학도는 신학 문제나 교과 관계에서 초월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참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신학 문제는 성경과 신앙에 직결되고 있다. 또한 기독교 교리사가 분명히 가르쳐주는 투쟁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루터와 칼빈 등의 신앙 노선과 신학 체계가 판이한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것은 정당한 것과 정당치 못한 것을 분별하는 데 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운동은 강령에서 분명히 우리 노선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강령은 칼빈주의 신학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최대 표현인 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칼빈주의 보다 더 나은 신학이 나올 수 있다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늘까지에 있어서 칼빈주의는 가장 성경 상에 깊이 뿌리 박은 체계있는 신학사상인 줄 안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칼빈주의 신학 위에 기초할 때 칼빈의 어떤 개인 사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밝혀준 성경적 신학 문제를 지지하는 것이다. 칼빈 주의 신학은 합리주의나 변증법적 신학에 대하여 예리한 투쟁을 한다. 그 범위는 방대하여 각 방면의 기초로서 칼빈주의를 논한다. 심지어 정치, 경제, 사상, 과학, 예술, 법률, 모든 일반학의 영역까지 기초되어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인 입헌 주의는 칼빈주의 사상에서 자란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칼빈주의처럼 현실에 충실한 사상이 없음을 인지한다.
또 신앙에 있어서도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신본주의의 성경 표현에 가장 정확한 것으로 믿는다.
칼빈주의는 현대 신학의 자유주의적 사고를 배격하며 또한 성경의 무오한 신적 권위를 무시하며 인본화하는 자유주의를 한사코 반대한다.
또한 우리는 정통만 부르짖고 생활을 무시하는 죽은 정통과도 싸운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주장한다.
학생신앙운동의 산 생명력 있는 투쟁력을 가지고 파숫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신앙의 확증을 증거할 수 있는 자립적 신앙이어야 한다. 이제 이 운동의 노선을 강령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학생신앙운동 강령
제 1항 우리의 신조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및 그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해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그 대소요리문답의 신학 사상은 칼빈주의 신학사상으로 성경에 기준한 것이니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 전혀 그릇됨이 없음을 믿는다(제 1장).
(주) 이는 합리주의나 신정통주의(바르트나 브루너 등의 교훈)에 반대되는 교훈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는다. 이는 어디서나, 언제나, 무엇에나, 하나님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통치가 있음을 믿는다(제 2장).
(주) 이는 이원론이나 유물론은 물론 이신론이나 범신론 바르트의 초절주의와 반대되는 참된 교리이다.
3. 인간의 전적 부패를 믿는다. 이는 인간이 구원에 들어갈 선을 전혀 행할 능력이 없음을 믿음이다(제 6장).
(주) 이는 알미니안 주의와 반대되며 바르트 주의가 인간의 불가능성을 말하되 피조성과 윤리성을 혼동함으로 성경의 원리와는 다르게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참된 교리이다.
4.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지한 무조건적 선택과 여원한 언약으로 되어 있음을 믿는다(제 3장, 제 7장).
(주) 이는 알미니안 주의와 개혁파의 예정교리를 믿지 않는 신정통주의와 반대되는 참된 교리이다.
5.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대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성신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서 탄생하신 참된 사람도 되시며 참된 중보자이시고 참 믿는 자들을 대속하시려고 죽으셨다가 몸으로 다시 살으시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시며 장차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제8장).
(주) 이는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의 모범으로만 생각하는 형대주의 신학과 반대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밎지 아니하는 신정통주의자 브루너의 교훈과 반대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계시에 대한 인표가 될 뿐이고 엄정한 의미에서 신학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는 신정통주의(바르트, 브루너)와도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6. 성신으로 말미암아 중생하는 은혜와 참된 사랑의 행실을 낼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자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인하여 의롭다 함이 되는 것과 참되이 회개할 때는 그 어떠한 큰 죄라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죄함이 되며(제 15장),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것과 참으로 택함을 받은 신자는 아주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음을 믿는다(제 10, 11, 15, 17장).
(주) 이는 중생과 궁극적 구원을 밎지 않고 인간의 가능성으로 구원에 참예할 수 있다고 하는 만인 구원론을 지지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반대되며 의롭다함이 된다는 것은 단회의 사건이 아니고 언제나 미래에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는 신정통주의와도 반대되는 참된 교리이다.
7. 하나님의 율법은 예로부터 누구나 지켜야 되는 줄 알며, 특별히 신자들은 의롭다 함이 되기는 그리스도를 믿으로만 되나 율법을 지킬 책임이 있으며 지키면 자기에게도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믿는다(제 19장).
(주) 이는 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신자의 본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줄 모르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은 듯이 율법을 과도히 주장하는 율법주의와 반대되며 하나님이 정하신 행위의 법칙들을 그대로 행하기 위하는 일을 문자주의라고 업신여기는 바르트주의와도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8. 신자는 성경에 위반되는 교훈이나 규칙에 순종치 않을 자유가 있음을 믿는다(제 20장).
(주) 이는 교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경험을 존중하여 서로 모순되는 주장까지도 포함하자는 타협주의와 반대되고 시간, 공간계의 존재는 비록 성경이라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일방적으로 파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르트주의와는 반대되는 참된 교리이다.
9. 이 세상 일이나 사회 일에 있어서도 신자가 성경의 교훈에 준거한 보통 은혜의 원리대로 관계할 유일한 참된 길이 있고 또한 그 원리대로 관계함이 일반 인류에게나 교회에도 차므로 유익할 줄 믿는다(제 23, 24장)
(주) 이는 신자로서 이 세상 일에는 무관주의를 가지는 혹종의 신비주의와 반대되며 보통은혜의 교리를 믿지 않는 바르트 주의와도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10.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이것은 신자들이 머저 진실되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순조롭게 가지는 신령한 교제이니 서로 받은 은혜를 존중히 여김과, 또한 자기의 은혜대로 남을 돕는 것과, 자기를 그리스도의 영광의 자리에 높이지 말고 모든 다른 신자와 동등인 것을 잊지 말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음으로 성립하는 교제임음 믿는다(제26장)
(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가 사귀어야 되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대중 연합을 고조하는 인본주의와 언필칭 옳은 것을 주장한다하여 개인주의를 경솔히 선동하는 그릇된 주의와는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11. 두 가지 성례 곧 세례와 성찬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알고 은혜 방편으로 믿는다(제 29장).
(주) 이는 성경에 명한 두 가지 이상의 수효를 주장하거나 혹은 침례를 하여야 구원이 있다는 듯이 과도히 주장을 하거나 성례를 중요시 하지 않거나 하는 주의와 반대되는 참다운 성경적 교리이다.
12. 회개케함과 규모를 세움과 악을 제함과 그리스도의 종녕과 복음의 파수와 하나님의 진노를 면케 되기 위하여 교회는 권징을 제풀도록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을 믿는다(제 30장).
(주) 이는 권징을 중요시 않는 신신학이나 바르트 주의에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13. 사람이 별세하면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고 몸은 흙에 들어 갔으나 세상 끝 날에는 몸이 다시 살 줄을 믿는다. 신자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복된 생활을 하고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가는 줄을 믿는다. 그들의 몸도 세상 끝날에는 다시 살게 되는데 다시 산 자는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고 다시 산 악인은 영원히 능욕을 당할 둘을 믿는다(제 32장).
(주) 이는 영혼이 별세한 후에 수면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주장에 반대하고 천당이나, 지옥이나, 부활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합치하게 생각지 않고 실존 철학에 의지하여 별다른 해석을 가지는 바르트 주의와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14. 이 세상 끝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줄을 믿는다(제 33장).
(주) 이는 내세를 부인하는 모든 그릇된 사상과 반대되는 참된 성경적 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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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항 우리의 목적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1. 목적 선정으로서 개혁주의
원래 개혁주의란 중세기의 천주교를 숭배하고 있던 오류들과 남용들에 대하여 반대하고 일어선 16세기의 종교개혁의 교회들을 특징짓는 용어였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그 용어가 종교개혁을 한 모든 교회에게 적용되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을 한 모든 교회가 오직 한 목적 즉 교회 생활의 광범한 극면과 개인적인 신자 생활의 사적인 국면에서 하나님 말슴에만 입각해서 산다는 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적극적이고 확실한 의미로는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도 반(半) 성경적인 루터파교회와 재세례파에 대한 구별된 명칭으로 사용된 이름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 선택, 제한된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의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가진 신학과 그 교회들에게 동일시된 이름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전 성경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지 결코 편협한 교리적 제한에 얽매인 말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이유는 개혁주의란 말이 오직 신적 권위의 상징인 성경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고 새로운 신적 통치를 시도하는 전 성경의 요구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주의란 말은 종종 칼빈주의와 동일시 된다. 칼빈주의를 개혁주의라 부름은 칼빈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국한된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개혁주의 신앙의 확립
상술한 신학 사상을 쫓아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① 성경주의 신앙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이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모든 관념,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도,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도 일체 배격한다. 오직 성경적 신앙 안에서 얻는 확신으로 감정하며, 사고하며, 행동한다. 모든 것은 성경에서 출발하고 성경에서 진행하고 성경에서 종착을 본다.
「우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게」 하는 것이다(고전 4:6).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앙가는 역사가이다. 이유는 성경의 주류는 엄연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모든 사실상 역사의 정점이다. 성경은 근본적이요 본질적인 사건의 기록이다.
② 정통적인 신앙이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돌을 취하기를」 영예롭게 여긴다(왕상 18:30). 우리는 「뉘게서 배운 것을 알기를」 자랑으로 여긴다. 구속 운동의 진리 역사는 오랜 세월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인류 가운데 역사하신 축복의 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잘 보여 주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지자와 사도의 터를 중시하며 그 위에서 순수한 신앙운동을 전개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거룩한 교회의 족적을 따라 보조를 같이한다. 이 아름다운 신앙 계통을 망각하고 독자적인 걸음을 함부로 걷는 것을 방지하며 배격하낟. 이것이 아벨, 셋, 에녹, 노아, 아브라함, 엘리야, 이사야, 그리고 사도들의 길이다. 개혁자 암브로시우스, 요한 낙스,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의 길이고 전도자 요한 번연, 스펄전의 길이고 항의자 윌슨, 메이첸의 길이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혼합주의나 언필칭 평화주의는 항상 방어와 경계의 대상이다.
③ 회개하는 신앙이다.
원래 개혁이란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의 영적 구조를 그 일차적인 의미에 둔다.
참된 회개는 신적 은혜의 역사 위에 기존한다. 즉 회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결코 나는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유는 나는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 2:1-3, 렘 17:9, 롬 6:23)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딤후 2:25)」 하는 성경 앞에 아멘 하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시 51:11)」 흉악자임을 자백한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 불결한 자임을 자백한다(시 51:5-7) 나의 무능력과 무의미성을 자각한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에만 한사코 움직인다. 주의 인자(시 51:1), 주의 밝은 자비(시 51:11), 주의 구원(시 51:12), 주의 의(시 51:14) 앞에 목마르게 된다. 참된 회개는 성별이다. 그것은 마치 저 갈멜산의 엘리야 제단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가득차게 하는 일과 같다(왕상 18:33,35) 온갖 바알적인 부정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성령의 강한 태풍 앞에 사로 잡힐 때 나의 부정을 직시하게 된다. 나는 그 더러운 부정에서 갈라지고 싶은 심한 생명적인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 어둠에서, 그 죄악에서, 그 사망에서 더나고 싶은 요동이다. 이것이 성별이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음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할 수 있으리요 (고후 6:14-16)」 참된 회개는 쪼개어 지고 만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의 제단처럼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는」 운동이다. 조개어 짐은 피 흘림을 의미한다.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죄의 값이다. 여기에 예수ㅗ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요청되었다(롬 6:23).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검에 의하여 (히 4:10) 먼저 자신을 쪼갠다. 내 눈에 들보(마 7:3-4), 내 입술에 부정(사 6:5-7)을 쪼갠다. 정신과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갈 5:24). 화 받아 망할 나를(사 6:5) 쪼개어 수술한다. 죄인 중에 괴수된 나를(딤전 1:15) 쪼개어 산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라고 주로 말미암아 죄악된 나를 쪼갠다. 이것이 몯ㅁ으로 드려지는 산 제사이다(롬 12:1-2). 인격의 중앙부를 십자가의 검으로 쪼개어 놓은 이 신비로운 생명체험 즉 회개를 기다린다. 다음에 내 가정을 쪼개고 사회를, 국가를, 세례를 쪼개어 각을 떠서 주 앞에 바친다. 회개만이 살 길이다(막 1:15).
④ 쟁취하는 신앙이다.
참 복음은 죄악의 시대를 향하여 거룩한 전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였다. 참된 복음운동은 「증인」이다. 증인이란 말은 순교를 뜻함이다. 순교는 죽음이다. 죽는 지경은 전쟁하는 사태를 말함이다. 참된 복음은 「이방을 잡아 먹는 것이다(행 10:13)」 잡아 먹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은 아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다(엡 5:12-17).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무장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됨을 자부한다(딤후 3:3-4). 개혁주의 신앙은 부절히 부절히 이 세상의 신과 불의와 어두움과 죄악에도 전하여 싸워 승리하여 십자가의 깃발을 점령지에 꽂는다. 쟁취의 굴복은 죄악의 노예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종된 애굽에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진리의 자유이다(요 8:34)
쟁취의 방법은 기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게, 구원의 하나님게 기도함에서 얻는 응답이다. 그 응답은 불이다. 초자연적인 불이다. 사탄의 마음을 태우는 불이다. 그것은 승리의 불이다.
우리는 재연하는 역사상의 애굽과 바벨론과 앏과 로마와 나치와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 우리 앞에 재연하는 온갖 20세기 바알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불가불 실력으로 대결해야 한다. 끄떡도 하지 않고 이 백성의 역사와 문화와 인습에 깊이 깊이 뿌리박은 샤머니즘과 우상주의와 싸워야 한다. 세계의 영계에 창궐하고 있는 온갖 인본주의의 표현인 자유주의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 기기묘묘하게 뻗어가는 신 근대주의(위기신학 = 신정통주의 = 바르트 주의)와 싸워 이겨야 한다. 급진일로에 있는 저급한 신비주의나 기복신앙과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 교회 내부까지 깊이 깊이 침투하는 세속주의와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 어처구니 없는 사신(死神)신학과 싸워야 한다. 물론 이성을 왕으로 삼는 과학지상주의와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
저 바로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던 모세처럼, 요단과 여리고성 앞에서 하나님 명령을 기다리던 여호수아처럼, 아합과 이세벨과 바알의 제사장 앞에서 여호와의 승리를 기다리던 엘리야처럼, 풀무불 속에 사자굴 속에 있던 히브리 청년처럼 우리는 쟁취하는 병사이다. 추호의 후퇴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쟁취만이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바로도 홍해도 모세에게 주고 말았다. 요단도 여리고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주고 말았다. 아합과 이세벨이 결국 엘리야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풀무불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태울 수는 없었다. 사자가 다니엘을 해하지 못하였고 그곳은 오히려 승리의 장이였다. 예수는 쟁취하였다. 그는 지구까지 깊숙히 뛰어 들었다. 그는 무덤의 감옥까지 들어가셨다. 그것이 그의 장사지내심이다. 그리고 무덤을 뚫고 불활함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르 해방하였다. 쟁취하는 승자였다. 이겨야 한다. 진 자는 이긴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이기는 길만이 개혁주의 신앙이다(요 19:30). 그러기 위하여 정확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훈련을 받아야 한다. 방어를 해야 한다. 공격을 해야 한다.
3. 개혁주의 신앙의 생활 확립
신앙과 생활의 일치는 개혁주의 신앙에서 크게 생명시한다. 그의 몇 배로 그들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마다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6-20). 흔히 그릇된 함정에 빠지는 자들이 있다. 신앙은 정통이라도 생활은 정통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정통이라도 생활은 신학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을 위험시하며 경계한다. 신앙과 신학의 정통은 결국 생활의 순결에서 그 열매를 보게 된다. 바른 신앙과 신학이 있는 곳에 바른 생활이 수반됨은 불가피한 현실의 요청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정통이면 맑고 깨끗한 생활의 열매가 우리의 주장이다. 맑고 청명한 생활없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언필칭 보수는 생활과 교회행정의 부패로 질식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소위 죽은 정통이란 역사의 혹평 앞에 망신을 당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이다. 반면에 신앙과 신학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생활에만 편중하여 신앙을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무서운 유혹에서 이겨야 한다. 이러한 그릇된 사상은 결국 윤리 혁신, 사회 개조, 신앙산회주의로 흘러가 버려 결국 기독교 본래의 목적에서 떠나 버린다. 마치 골격이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다. 둥치가 없는 가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나무일 수가 없다. 포도나무 가지는 둥치를 떠날 때 마르는 것(죽음)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생활의 일치는 요긴하다. 이런 의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약 2:26)」는 성경 앞에 우리는 다함께 아멘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생활은
① 진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이다(對神관계). 이것은 신앙으로 표현한다. 즉 마음의 진실이다. 사람 앞에서의 진실이다(對人관계). 이것은 사람으로 표현된다(창 1:28). 우리는 사고에도, 의지에도, 감정에도,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은 힘이다. 진실은 사실이다. 사실만이 힘의 노예다. 우주와 역사는 결국 진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이 역사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는 말에도, 행동에도, 들음에도, 전함에도, 교제에도 진실을 추구한다. 이것은 갓난 아이가 된(벧전 2:1)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자질이다.
② 겸손이다.
겸손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빌 2:1-5). 겸손은 자기의 영광을 비는 것이다. 겸손은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의 가장 자리에는 피가 고여 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겸손은 온갖 은총의 저장소이다. 겸손은 온갖 승리의 잠재력의 출력이다. 겸손은 미덕의 활력소이다. 겸손은 두 마음이 아니다. 겸손은 종의 마음이다. 결국 겸손한 자를 통하여서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③ 순결이다.
순결은 비둘기로 묘사하였다. 그는 평화의 상징이다. 순결은 섞임이 없는 것이 그 성질이다. 거기엔 궤휼과 악독과 시기와 비방이 없다. 이단과 분리와 당 짓는 것과 수군수군함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순결은 갓난 아이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것은 확실히 진리이다. 포도를 심었는데 머루나 들포도를 기다릴 수 있을까? 성경적 신앙(개혁주의 신앙)을 심었으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갈 5:23)를 맺는 것이다.
4.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
우리의 목적항 마지막에 「…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① 빛의 역할
하나님은 빛이시다(요1서 1:5). 이는 창조의 빛이시다(창 1:3). 예수 그리스도도 빛이시다(요 8:12). 그는 참 빛이시다. 빛의 구원이시다(요 1:9). 그는 구속의 빛이시다(요 1:4).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인 것이다. 그 반사물은 새로 지음 받은 우리의 양식이요, 산 위에 세운 빛의 궁전 교회인 것이다. 빛은 직선이다. 거기에 기교가 없다. 빛은 어둠의 정체를 밝힌다. 거기에 들어 나지 않는 어둠이 있을 수 없다. 빛은 열이다. 거기에 온갖 병균은 살균된다. 그 빛에 온갖 생명들은 자란다. 빛은 결실이다. 거기에 만족과 안위가 뒤따라 오게 된다. 계시에 접한 모세의 얼굴에 빛이 있었다. 자기 빛이 아닌 영광의 빛의 반사이다. 여기에 우리 운동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제 3의 빛이다. 사죄의 빛, 믿음의 빛, 소망의 빛, 사랑의 빛이다.
② 소금의 역할이다.
소금은 방부제이다. 온갖 부패 앞에 그는 필요 부가결이다. 소금은 조미제다. 온갖 식품에 용해된다. 소금은 의료제와 온갖 해독에 자신은 용해된다. 소금은 정결이다. 온갖 불결 속에 용해된다. 소금은 언약의 상징이다. 고슴 언약은 언약의 동맹을 표시하며 불변을 상징한다(민 18:19 ; 대하 13:15). 소금은 희생이다. 그는 모든 부분에 자신이 용해하여 깊이 침투한다. 소금은 대중이다. 그를 소유하지 않은 자 어디에도 없다. 그를 사용치 않은 자 아무도 없다. 그는 가장 평범한데서 그의 효능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신앙운동은 대중운동이다. 그 어디에나 복음의 효능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제 3항 우리의 사명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1.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2.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에의 복음화
서론적 전제 : 보통 사명이라 말할 때 지워진 바 임무 혹은 사신(使臣)이 맡은 명령, 임무 등을 뜻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세상에 선지자로, 제사장, 왕으로 임명하였다. 「복음화」의 사명은 학생신앙운동의 존재 의의를 성립시킨다. 이 운동의 존재 목적을 규명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 개인의 복음인 동시에 온 세계가 소유할 공유적(共有的) 복음이다. 성경은 세상의 구주, 세상의 빛, 세상의 생명, 세상의 떡이라고 진리의 우주성을 밝히고 있다. 여기엔 성경이 명한 길을 쫓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명의 제 1항이다.
1. 대내적 사명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행 1:18)」 이것이 우리의 사명 코스이다.
① 개혁주의 대한교회 건설의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회와 국가의 양심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활로는 국가의 활로이다.
첫째,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 건설자가 되기 위하여 먼저 개혁주의 신앙훈련을 교회에서 받는 것을 1차적인 순서로 정한다.
둘째,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 건설자가 되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한 알의 밀알로 봉사하기를 2차적인 순서로 삼는다.
셋째,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하여 평신도 운동자로서 교회 직분들에 충실함을 3차적인 순서로 삼는다.
넷째,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복음전파에 전역하는 전도자(목사)로 나갈 마음의 자세까지 항상 가다 듬는다.
다섯째, 또한 우리는 항의자의 소리를 잊지 않기를 원하다.
② 국가의 복음화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국적을 하늘에 두었다. 동시에 현실적인 의미에서 이 땅 위에 국민된 것도 잊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충성함을 나타낸다. 이 세상의 국가는 일정한 영토 안에서 독자적 정부 조직을 가지고 백성의 인정을 기초로 하는 공동사회이다. 만약에 무죄 상태의 국가였다면 개인적은 의무로는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전시키고 경찰과 국방과 죄수를 위한 법률 제정은 불요 하였을 것이다. 다만 창세기 1:28을 쫓아 무죄 세계에서의 문화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 세상 정부형태는 타락했고 변질되었다. 불법과 무질서와 파괴로 혼돈됐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국가 형태의 모든 통치권과 조직은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권리와 공공 복리와 안녕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붙잡고 계신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적인 국가 요소를 복음화 시킴은 마땅히 요청되는 우리의 본분이다. 그러기 위하여
첫째, 우리는 쉬지않고 국가를 위하여 기도한다.
둘째, 권력 구조의 타락과 부패를 주시하며, 항거하며, 고발하며, 경책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아니한다.
셋째, 국가를 위하여 세운 모든 제도를 계명 안에서 자진 순종하며 모든 백성의 본이 된다.
넷째, 더 나아가 국가와 사회(정치, 경제, 문화, 예술, 언론 등)의 요원이 되어 요셉처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처럼 신실한 청지기 사명을 통하여 복음화에 앞장선다.
다섯째, 특수한 사명을 띄고 있는 복음 전도자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슬기로운 고문과 권고에 이비지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심을 보여준다.
③ 학원의 복음화
학원은 우리의 농장이다. 학원은 우리의 일터이다. 학원은 우리의 신령한 전쟁터이다. 학원은 온갖 무신론과 이성주의와 세속주의의 공장이 될 우려가 있는 곳이다. 학원은 온갖 인본주의의 니므롯 자손을 생산할 위험지대이다. 그러나 반대로 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는 진리의 고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하여
첫째, 주어진 학과에 충실하여 타의 본이 된다.
둘째, 학창내의 모든 봉사, 희생활동, 그늘진 부분에 솔선수범하여 일한다.
셋째, 불우하고 약한 학생과 교제하며 강한 자와 교제하기를 귾이지 아니한다.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지식으로 교제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긴다.
넷째, 우리의 스승을 존경하며 그들의 수고에 자진하는 손발이 된다.
다섯째, 우리의 강령 앞에 함께 고백하는 신앙동지끼리 학교 SFC를 조직하고 힘의 규합으로 적극적인 복음화에 진력한다.
2. 대외적 우리의 사명
성경은 「땅 끝까지 이르러(행 1:8)」라고 하였다. 우리의 사명 제 2항에는 개혁주의 교회의 세계 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는 이 성경을 쫓아 설정된 것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성경의 지원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앙의 우주성을 모르는 무지이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유다에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움직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 자체의 운동에 포로가 되어가기 원한다. 명예로운 진리의 포로이다. 그러기 위하여,
첫째, 개혁주의 학생신앙운동 동지들과 세계적 친교를 모색한다.
둘째, 외국에 산재하는 신앙동지들과의 유대를 가지면서 이 운동을 잰개함으로 전진 기지를 확보한다.
셋째, 자신들의 일반 문화적 사명 수행을 통하여 복음운동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넷째, 기록활동인 문서 운동을 통하여 우리 운동의 주장을 전달한다.
다섯째, 성경적 복음전파자(개혁주의 신앙)로 선교사의 사명을 띄고 전진한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54:2-3)」
제 4항 우리의 생활원리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1.하나님 중심
이것은 칼빈주의 원리의 최대 표현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를 뜻함이다. ⓑ 하나님의 의지 적용의 자유를 말함이다. ⓒ 의지 적용의 결과 성취의 자유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이란 곧 하나님의 주권이 영계에 있어서나, 도덕계에 있어서나, 자연계에 있어서까지 지배됨을 이름이다. B.B 워필드 박사는 말하기를 "칼빈주의자는 모든 형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며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서 자기 전 생애 태도로 삼으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아 의존의 전부는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이다." 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원리는 그 어디에서나(장소와의 관계), 언제나(시간과의 관계), 그 무엇에나(사건과의 관계), 그 누구에게나(대인관계) 「하나님의 사상」 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 작용에도, 감정 작용에도, 의지 작용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상을 정립한다.
우리 생의 시작은 하나님! 우리 생의 진행도 하나님! 우리 생의 마침도 하나님! 하는 사상을 확립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롬 11:36)」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렘 10:10 ; 살전 1:9). 하나님은 가까운데 하나님이시요 먼데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렘 23:23-24 ; 시139). 그는 전능하신 분이시다(창 1:1). 그는 양심의 주재자이시다. 그는 역사와 교회의 주인이시다.
2. 성경 중심
하나님 사상의 자기 표현을 우리에게 나타낸 것이 신구약 66권 성경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신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법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다. 우리는 기록된 성경 밖에 넘어 가기를 원치 아니한다(고전 4:6)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다고 고백할 때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①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자증이다(딤후 3:16). 이것은 우리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장 2항의 첫 머리에 가르친 원리이다.
② 우리는 성경이 옛 선지와 사도의 시대에 적용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후대 사람 특히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진리인 줄 믿는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고 하였다.
③ 우리는 성경 원본 즉 선지와 사도의 기록이 그릇됨이 없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친대로 믿는 성경 도리이다. 즉 영감 도리이다. 예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하였다(요 10:35). 하나님께서 선지와 사도들을 성경 기록자로 사용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진리를 전할 때 말로나, 글로 실수 없이 감동 하셨음을 믿는다. 또한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모든 그릇된 이설(異說), 기계적 영감설, 동력적 영감설 등도 단호히 배격한다. 뿐만 아니라 영감의 범위에 있어서도 언어의 영감이 아니고 사상의 영감이라는 것을 배격한다. 도덕적 영감에만 영감하고 역사와 연대의 부분에는 여감하지 않았다는 설을 배격한다. 신약에만 영감하고 구약에는 영감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을 배격한다. 신약 중에도 산상보훈에만 영감하고 다른 부분에는 영감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을 배격한다.
④ 우리는 많은 사본들로 말미암아 엄밀한 정확성을 가지고 전사(傳寫)되어 내려온 우리의 성경이 그릇됨이 없이 전승되어 온 것을 믿는다. 사본과 사본들 사이에 있는 사소한 차이점들 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은 사본상 차이점 혹은 논쟁점이라고 할 것이다. 성경 차제가 그릇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유는 우리의 성경이 한 개의 사본이 아니로 1만 2천 여종의 많은 사본을 통하여 보조된 원본 그대로의 전달을 사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든 일들과 이치들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절대 심판율인 것을 믿는다. 어떤 사람의 공동 의견의 주장과 결정보다 성경의 주장과 권위를 더 앞세우는 것이다(롬 3:4). 어떤 인간의 주관적 영적체험보다 성경의 참 됨을 믿는 것이다.
쯔빙글리가 일찌기 종교개혁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말씀 밖에 신뢰하는 것은 유사종교요,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운동을 여하한 유명의 인물이나 역사상의 위대한 산물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 그 자체의 권위에다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 안에서 사고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에의 만족이고, 기쁨이고, 더할 나위 없는 진보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도 침묵한다. 성경이 진행할 때 우리의 사색도 진행하며 성경이 멈출 때 우리의 모든 것도 멈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퇴보가 아니고 진보이다.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비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 앞에 붙들린 노예가 아니라 성경에서 참 자유를 얻는 해방인 것이다. 성경만이 인생관, 구원관, 내세관, 역사관, 우주관을 바로 제시하여 주는 진리의 근원인 줄 믿는다. 성경만이 오늘의 인간 이성을 비판하며 분석하고 시정하며 선도하는 최고의 권위가 보유된 줄 믿는다.
성경만이 현대의 동요를 잔잔케 하며 기계문명(탕자문명)의 종말을 직시하는 줄 믿는다(딤후 3:16 ; 롬 15:4 ; 사 34:16; 히 4:12; 마 4:4). 그럿다면 성경만이 최고의 결재자요 판단자이다. 성경이 "아니다"고 하는데 나는 "예"라고 하든지 성경이 "그것이다"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할 때 그는 벌써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진 자이다.
3. 교회 중심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교회란 복음 진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집단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불렀다(고전 12:27; 엡 1:23; 골1:18). 또한 「하나님의 성전」 혹은 「성령 전」 (고전 3:16; 벧전 )이라 하였다. 「하늘의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갈 4:26; 히 12:22; 계 21:2,9-10) 이라 하였다. 「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5)라고 불렀다. 이런 명칭은 모든 교회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교회가 "주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교회 운동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실상 이 교회운동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씨가 반목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교회 운동이 언제나 동일한 형식을 취한 것은 아니다. 족장시대의 교회운동은 주로 경건한 가정에서 보존되었다. 홍수시대의 노아는 이 것의 대표이다. 그 후 신성한 종교가 다시 파멸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자기의 신령한 교회운동을 나타냈다. 이 가정을 통항 교회 운동은 모세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다음 모세시대와 그 후 시대에 와서는 한 국가의 조직 안에서 그 중앙 성소를 중심하고 집단적인 교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소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조직의 문을 열게 되고 세계적(우주적) 교회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성경적 고찰을 볼 때 하나님은 그의 택자 구원운동을 전개하심에 있어서 교회운동을 통하여 이룩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적 진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중심이 아닌 여하한 운동은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몸에서 떨어진 손발의 지체가 존재할 수 없음 같다고 성경이 가르친다(엡 1:10,22-23; 4:4,11-16; 5:23,30; 골 1:18-19) 그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지체이다(요 15:-1-10)
우리가 교회 중심이라 할 때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같는다.
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라는 것을 믿는 사상이다. 그는 이중적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시다. 그는 유기적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시다. 또한 권위를 갖고 교회를 지배하시는 왕이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원수이다(마16:18-19; 23:8, 10)
② 그리스도는 말씀을 방편으로 교회의 권위를 행사 하심을 믿는다. 이것은 왕의 말씀이다.
③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주심을 믿는다.
④ 진정한 말씀의 전파, 정당한 성례의 집행, 신실한 권징의 실행이 주께서 세운 교회 제도를 통하여 이룩하여 감을 믿는다.
⑤ 교회는 우리 신앙과 생활 연단의 제 일차적인 장소이다. 교회를 통한 신앙 생명의 내적 성장의 결과 학원과 국가의 복음화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교회와 상관하지 않은 신앙운동은 배격한다.
(3) 맺는말
이 신조! 이 목적! 이 사명! 이 생활원리!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끊는 피와 함께 신앙 생명으로 통하여지는 접전의 포고문인 것이다.
이것은 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운동의 공동 고백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공동 고백에서 멀어질 때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지는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호도 이것이요, 우리의 모토도 이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운동의 전부이다. 우리는 이 강령의 고백에 호흡을 같이하고 깨닫고 싸운다. 이것은 마치 여인이 그 정조를 중히 여기듯이 우리는 이 강령을 중히 여긴다.
학생신앙운동이 이것으로 통일되고 진군의 호흡도 이것으로 연결된다. 한국도, 아시아도, 전 세계도 다 한 마음으로 이것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에 우리에게 주어진 제 2의 종교개혁의 슬로건이다. 이것은 최악의 시대가 만난 난국 타개의 유일한 활로이다. 사람들은 거듭거듭이면 위태로운 기회의 문 앞에 설 때마다 분명한 자기 처신 원리를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가야될 지표가 뚜렷함을 주께 감사한다. 우리는 축복스럽게도 아름다운 신앙의 조부들과 정통적인 신조와 순교의 피로 물려주신 선배들의 제단이 있다. 우리의 행방은 너무나 뚜렷하다. 우리는 조부들의 공과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 조부들의 신앙업적을 계승하는데는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 조부들의 육신과 전통을 철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사려하고 부주의하여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책임을 피할 수 있고 시정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조부들의 물려 준 유산에 대하여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조부들의 유산을 나와, 나의 이웃과 나의 백성과 나의 후손들에게 미치게 하는 신앙운동의 전달과 계승에 대하여는 전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 신앙운동에서 우리 조부들의 전통에 대하여 보다 나은 양식과 정상적인 신앙의 분별력을 가지고 새롭게 하여 활용해야 한다. 다만 전통에 노예가 되거나, 그것들을 예찬만 한 나머지 만족하므로 자족만을 느끼거나, 전통이면 최고이고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여 생각없이 모방하거나, 추종 내지 맹종만 일삼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전통을 말할 수 없이 그릇되이 사용하는 역사의 과오자들이 될 것이다. 그 고유한 신앙 전통 속에 숨어있는 피의 생명을 전수 받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위와 같은 우리의 노선을 따라 어거스틴의 십자가적 강한 은총의 신념이 있을 따름이다. 아타나시우스 같은 십자가적 변증의 교리가 주창될 따름이다. 루터와 같은 투쟁 의지, 칼빈의 개혁력, 메이첸의 항의력, 주기철 손양원 목사 같은 순교자적 정신이 솟아 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