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강령 해설

학생신앙운동의 의의 <학생신앙운동 20년사>

노랑 테니스 공 2023. 5. 4. 15:48

학생신앙운동은 외국 어느 단체에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일어났다. 학생신앙운동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서 한국의 기독학생을 중심하고 일어난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신앙운동인 것이다. 그러면 이 「학생신앙운동」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

학생신앙운동은 통칭 영문으로 SFC」로 불리고 있다. SFC는 Student For Christ의 약자인데 '그리스도를 위한 학생'이라는 뜻으로 '학생신앙운동'을 말한다.

이 학생신앙운동은 다음의 몇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I. 「신앙」만이다.

 

1. 신앙은 신생 안에서의 진리 파악이다.

신앙은 이치적인 행위가 아니다 또 주의 깊은 사색과 연구의 결과도 아니다. 신앙은 신생(新生)에서 움직이는 진리 파악의 신비로운 작용이다. 칼빈의 경우에 의하면 "신앙은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다." 신앙의 사랑이란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는 약속의 진리 안에서 발견되고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며 우리 가슴속에 인침을 받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고(엡 2:3) 다음에 하나님께 의존하는 인간의 행위가 이차적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그 성질에 있어서 명백하여진 것과 같이 마음의 수동적인 상태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일차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원하는 활동의 상태와는 다르다. 외적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바를 간증하고, 설교하며, 전도하고, 사회봉사하는 것이다(마 16:23 이하).

진정한 신앙의 제 일차적인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죄인인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엄숙한 자기 정복의 상태인 것이다(갈 5:24).

그러므로 여기에 본질적인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수반되는 가장 첫 번째의 현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자신의 초자연적 개조 운동(새사람 운동)인 것이다. 사회 개조이기 전에 자신(죄인)의 변화이다. 윤리 혁신이기 전에 자신의 심령 혁신이다. 문화 사업이기 전에, 친교이기 전에, 사회봉사 사업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되는 운동이다.

2. 신앙은 필연적인 실행을 수반한다.

그러나 좋은 나무가 좋은 과실을 맺듯이 진정한 신앙은 선한 열매를 맺는 필연적인 행위의 결과를 낳게 한다(마 7:16~17)이 열매는 신앙의 증명이 된다.

3. 선행의 주격은 신앙 그 자체만이다.

그러나 내가 일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자신을 정결케 하고 나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주격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 그 성자의 대속을 믿는 이 신앙이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성결케 하고 선한 열매 맺게 한다(갈 2:20).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은 다만 신앙의 눈으로써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볼 따름이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이 나를 강권하며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이 그의 자비로운 성령을 통하여 나를 충만케 하사 나를 그의 기구로(의의 병기) 하여 내 안에서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일을 하게 하신다.

이것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나 가장 어리석은 현대인의 인생관은 아니다. 이것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을 패하게 하는 크리스찬의 참 인생관이다. 즉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이것이 우리의 활로이다. 여기엔 예부터 해결 못할 철학의 근본 문제인 개체(個體)와 전체(全體), 자율과 타율, 그리고 수동과 능동의 조화가 완전히 그리고 지극히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신앙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의 이상적 존재 상태이다.

4. 사업으로서의 신앙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는 이 역사를 속량, 사회 안에서 이끌 하나님, 인간 대 자연의 조화를 위하여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진출을 역설하고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 각 부분 기독화를 강조하고 역설한다. 그러나 문제는 산업 부흥이나 제도의 개선이나 윤리화 등 외부에 있지 아니하다. 언제나 죄인 된 인간 자체 안에 있다. 여기에 죄인 된 인간을 높이고, 성결케 하고, 지혜롭게 하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하나 사실 그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그것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우리들의 사업은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사업」 (대속)만이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고 흠 없고 점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세우신다(벧전 1:18~19, 골 1:22).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요 6:28) 하는 질문을 받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 6:29)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이다. 기타 사업은 유일한 신앙의 결과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다. 국제사업도 아니다. 기타 여기에 관련된 여러 잡다한 사업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딛 2:14) 이것이 우리들의 구원이다. 그렇다면 사업으로서의 신앙은 안된다. 신앙으로서의 사업만이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II. 이것은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은 몸을 놀려 움직이는 것, 어떤 일의 주선을 위하여 힘쓰는 것, 위치가 바뀌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1. 신앙 운동이란 「생명의 요동」을 뜻함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요 1:14) 근원적인 것에 기초한다. 이 말씀은 「생명」 (요 1:4)인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이 빛이 흑암의 세상에(사망의 그늘진 땅)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이다. 그는 로고스였다. 그는 태초에 계셨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가 존재함이 되었다.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찾아 움직였다. 실로 위대한 생명의 운동이었다. 「자기 땅에 오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요 1: 12~13) 고 하였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구까지 움직였다(화육).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는 움직임, 즉 신앙이 요동하였다(엡 2:8).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를 영접하심(믿음)은 동적(動的)인 생명의 요건이다. 하늘에서 세상으로 생명(로고스)이 움직였다. 그 결과 세상에서 하늘로 새 생명 즉,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움직였다. 이 움직임과 움직임이 마주치는 곳에 「운동」 이 일어났다. 그것이 생명운동이다. 생명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생명을 제 자리에 멈출 수 없다. 생명은 전진이다. 생명은 성장이다. 생명은 창조이다. 그것은 불가항력적 생명의 요동이다. 신앙 운동은 생명 자체의 요건이다.

2. 신앙 운동이란 동(動) 적인 자세 정립을 뜻한다.

그것은 중세적인 자세에서 단호히 탈퇴한다. 그것은 어떤 사색적인 자세에서 분연히 일어선다. 그것은 어떤 정적인 자세(회 - 會)에서 그 위치를 바꿔 동적인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떨어진 밀알이 땅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내용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을 받은 거룩한 생명이 두터운 죄악의 대지를 뚫기 위해여 움직이는 무한한 잠재력의 폭발적인 가동성과 가동을 말하는 것이다.

3. 신앙운동이란 이 시대를 향하는 개혁 운동을 뜻한다.

우리는 문제의 시대를 호흡하고 있다(딤후 3:1~14). 이 문제의 시대에,

① 하나님과의 관계 (對神 관계)에서 죄인 된 자신의 개혁을 그 칠자적인 순서로 한다.
② 이웃과의 관계 (對人 관계)에서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불신의 영혼에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를 목표한다.
③ 자연과의 관계 (對物 관계)에서 - 그릇된 자연관에 대한 재해석 - 정복, 통치를 목표한다. 이것은 저 에덴동산 문밖에 일어난 아벨의 신앙운동부터 시작하여 셋,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아모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순교자 등으로 계승되어 오는 성경의 정통적 진리인 개혁(칼빈) 주의를 파수하는 이 시대의 개혁 운동이다.

이 운동은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개혁 운동이다. 이 위기란 단지 사회적, 철학적 의미로서가 아니다. 실로 역사 전체와 심각한 인간 부패성의 현대적 술어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왕왕 이 위기를 사회적, 윤리학적 문제로 이해하여 현대적 기독교 운동이 사회 개조와 윤리 혁신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의 사상적 토대에서 노동조합, 정치, 경제, 문화운동으로 기독교가 뜻하는 핵심적 요소를 성취하고자 한다. 심지어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결합점을 모색하며 인도적이란 입장에서 용공적 정책까지 시도하고 있다. 또한 윤리 운동으로 국제적 기구를 가져 예수님의 교훈에 도덕적 효과성만을 강조하여 성령으로 인한 인간성의 초자연적 개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 혁신 이전에 진정한 회개와 신앙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 휴머니즘 운동이 있기 전 그리스도 안에 새사람이 앞서야 할 것이다. 사업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본적직 결과로서 사업이 따라오는 것이다. 결국 제도나 조직이기 전에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 영광에 귀결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 영광」 이란 거룩한 목표 앞에서 한 알의 밀알 운동(개혁 운동)을 하는 것이다.

제7회 학생신앙운동 동기대회 / 1953년 1월 5일 - 11일 / 고려신학교 / 영광은 하나님께 / 강사 : 이상근, 박윤선, 한명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