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건 간사(부산고교 SFC)
어느 여름 수련회에서 마지막 찬양집회를 다 마치고 막 철수를 하려 고 할 때였습니다. 한 패거리의 고등부 학생들이 와서는 싸인을 해달라 고 줄을 서는 것입니다 순간 그 렇게 열심히 찬양하던 그들의 마음이 의심스러워서 호되게 야단을 쳤었습니다 “나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팀은 그룹 사운드가 아니야 !” 목요모임에서는 가끔 구경 오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점잖게 꾸짖어 돌려 보낼 때가 여러 번입니다. 그럴 때면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시던 어른이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 감정만 흥분시켜 놓는 것은 아닌가 ?” 그렇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 결코 아무렇게나 할 일은 아닙니다. “찬양은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찬양의 모습들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이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찬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비뚤어진 찬양의 모습들은 아무래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양에 대한 오해들올 먼저 생각하는 것이 찬양의 바른 방법을 정리하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1. 찬양은 요즘 유행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찬양의 물결을 보며 걱정하는 분들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간에 지나면 사그러질 유행 같은 것 . 그래서 유행에 민감한 젊은 아이들이나 하는 것,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은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게 하기 위해 지었다(사 43:7, 21)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찬양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고귀한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유행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올 높이기 위해 행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동안 “찬양하는 사람들” 이어야 합니다
2. 찬양은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찬양이라는 말이 참 싫습니다 하나님은 오픈 게임에서는 찬양받으실 준비만 하시고, 본 게임에서야 찬양을 받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준비찬양, 그것은 가끔 늦게 도착한 강사를 기다리기 위해서 시간을 때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지만, 찬양은 그런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왕을 알현하는 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예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속에 있기를 좋아하십니다(시 22:3).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찬양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통로 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떼우듯이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야길 할 때마다 찬양 중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은몸을 부들부들 떨만큼 놀라던 한 자매가 생각납니다.
3. 찬양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영혼의 깊은 상처들이 치유되기도 하고(렘 17:14),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승화된 감정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찬양은 우리의 그러한 만족과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자주 자신들의 쾡하게 뚫린 마음을 적당히 숨기기 위해 찬양 모임에 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기분에 맞지 않는다고 찬양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그러나 찬양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도피처도 아니고, 우리의 기분에 따라 선택되어질 일도 아닙니다. 찬양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찬양에 임하기 전 우리는 이런 결심들을 해야만 합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한다. 모든 환경과 형편을 초월하여 하나님만을 찬양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멍청하게 무디어진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명령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만약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 찬양을 드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유행가 가수의 라이브 콘서트에 참석해서 흥분하고 소리 지르는 것과 도무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두십시오.
4. 찬양은 군가가 아닙니다.
어느 분이 찬양은 십자가 군병들의 군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의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군가는 지쳐있는 군사들의 사기를 진착시키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찬양은 군가가 아닙니다. 찬양은 군사들을 힘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이 들고 나아가서 싸워내야 할 무기입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우리는 찬양대를 앞세워서 전쟁터에 나아가는 어리석어 보이는 군대를 보게 됩니다. 아무런 작전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명령대로 찬양을 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들의 무기는 찬양이었습니다. 시편 149편은 열방의 왕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기를 소개하는데, 그 하나는 손에 있는 칼(이것은 에베소서 6장의 셩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고, 또 하나는 입술의 “하나님의 존영” 입니다. 하나님의 존영이라는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것이 찬양(the praise of God)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이 무기인 것이지요. 견고한 사단의 진을 공격하고 대적하여 무너뜨릴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들의 무기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저 군가를 부르듯이 찬양할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의 세력들을 노려보며 전쟁에 나아가는 군사같이 당당하게 해야할 것입니다.
5. 찬양은 노래만이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하고 싶은 내적 충일함의 외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기쁨들을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이 찬양에 동원되어질 수 있습니다. 찬양을 위해 준비해 두신 책, 시편을 읽다보면 너무 다양하고 어색해 보이는 찬양의 방법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노래만이 아닙니다. 손을 들고, 춤을 추며, 큰소리로 소리를 외치며, 손바닥을 치며,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유함 가운데 찬양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싶은데
찬양 인도를 멋있게 하고 싶은데…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떤 형제는 그런 소원으로 목요모임을 그대로 교회에서 흉내를 내기도 했답니다 . 곡목과 순서, 그리고 사이에 던지는 선포의 내용까지 그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날 그 찬양모임은 하나님이 그렇게 받으실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흉내내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찬양을 하는 사람의 인격이나 영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올 경험하고 아는 만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찬양하는 사람에겐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소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찬양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기교를 배우는 일보다 영성훈련을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성은 흉내만 내어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마 5:8)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고, 찬양은 그 예배 로 나아가는 통로라고 한다면 그 말씀은중요 합니다.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혼자서 그 분의 그러한 성품을 찬양하고 예베하는 훈련을 쌓으십시오. 그것이 쌓여야지만 아마 훌륭한 예배자, 찬양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심으로, 온 힘 다해
헤어지기 싫어서 울어버릴 만큼 존경했던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씁입니다. “내일은 찬양할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온 인격과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열심히 찬양합시다.” 그리고는 그 굵은 목소리로 예배당이 쩌렁쩌렁 올릴만큼, 앰프가 목소리를 감당하지 못해 부르르 떨릴 만큼 열심히 찬양하시던 그 목사님께 찬양을 바르게 하는 한 방법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은 몸과 마음으로 소 리를 높여 하는 것, 마치 오늘이 찬양할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어지고 살 기회를 선물 받은 자들이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살아 있을 이유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사랑하는 알돌 친구들, 우리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전심으로, 온 힘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