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닥불은 2007년에 창간되었던 서울U-SFC 소식지입니다.
박미연 (덕성여대)
일주일 전,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방학 동안 아껴두었던 수다를 실컷 떨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원고 청탁을 의뢰하는 전화였다. 통화를 마치자 친구들은 도대체 누가 전화한 것인지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처음 목격한 친구들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난 그 대답마저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청탁받은 글의 주제 - '나는 왜 SFC 운동원인가?' - 를 떠올리자 막막함과 부담감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왜'라는 의문사 뒤에 SFC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선 조합으로 여겨질 정도로 지금의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아니 당연시되는 그것을 앞에 두고 '왜'라고 물으니 막막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최근 영적 상태가 불량한 나로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삶으로 나타나는 것과 글로 쓰여진 것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내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성향과 근원을 알 수 없는 괜한 책임감이 막막함과 부담감을 눌러 버렸으니 청탁을 수락하겠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은 이미 수십 초 전의 과거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휴, 그래서 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SFC가 자연스럽게 내 삶에 녹아들기 이전은 어떠했던가 하고 말이다.
일본과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해이자 '4강 신화'를 이루었던 2002년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다. 시청 앞 광장에 응원 한 번 나간 적 없지만 나 또한 2002년은 매우 특별했던 한 해로 기억한다. 월드컵 열기로 날마다 기온이 0.5도씩 오르는 듯했던 그 해, 나는 이름도 암담한 '장수생'이었다. 거듭되는 수험 생활로 영혼은 점점 피폐해져 가고 몸은 몸대로 축이 나고 있던 때였다. 사실 수험 생활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관계에 대한 불신과 소통에 대한 회의였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지만 모두 빈 말처럼 여겨졌고 이 세상은 나의 상황에 대해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듯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겠노라고 외치던 나에게 한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하지 한 번 참석해 보는 것 어떻겠냐며 부드럽게 제안해 왔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한 뒤로부터는 주일 예배를 꼬박꼬박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침을 튀겨 가며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한 번쯤 가줘야겠다고 생각했고, 별생각 없이 청년부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특별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정아 언니'였다.
해가 바뀌어 입학을 앞두고 집에서 뒹굴고 있던 어느 날, 당시만 해도 그리 친하지 않았던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하면 언니는 새내기 사업의 밑거름을 뿌리는 작업 중이었던 것인데, 그러한 정황을 전혀 알 길이 없었던 나는 그저 며칠째 집에만 있는 것이 지겹고 답답해서 바람이나 쐴 겸 약속 장소로 나갔다. 언니는 입학 축하한다는 메시지로 만남을 열었고 곧 'SFC' 라는 이상한 이름을 꺼냈다. 형제, 자매라는 말조차도 어색해서 입술이 쉽게 떼어지지 않던 나에게 언니는 '개혁주의' 를 얘기하였고 학생자발성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언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선교단체에 대한 개념 자체도 정립되어 있지 않던 내게 SFC는 조금 특이한 동아리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아 언니와의 만남이 기억에서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었고 어느새 새내기 O.T.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O.T. 당일, 늦잠을 잔 탓에 부지런히 모임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낯익은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아 언니였다.
시베리아만큼이나 춥다 하여 일명 '덕베리아'라고 불리우는 한겨울의 캠퍼스에서 정아언니는 다른 한 사람과 함께 SFC 포스터를 게시판에 붙이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당시 덕성여대를 담당하고 계셨던 김지명 간사님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언니가 전에 얘기했던 SFC와 개혁주의는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문득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덕성여대 SFc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고 괜스레 부담이 느껴졌다.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섬길 사람은 늘 부족하던 때였다. 하지만 개강 후 동아리 박람회 때 내 손엔 이미 SFC 브로셔가 들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새내기에게 브로셔와 사탕을 쥐어주며 SFC 홍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내가 없으면 왠지 이 공동체의 상황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주제넘은 걱정이 SFC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큰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안 가면 빈자리가 더 크게 날 텐데 하는 마음에 빠질 수 없었고 정기총회 때에도 나의 쓸데없는 걱정은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2004년, 난 회계가 되었다. 회계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저 회계 자리에서 회계 일을 했을 뿐이었다. 한편 내 알돌이었던 정아 언니는 휴학을 했고 더 이상 위원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니는 변함없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종종 편지를 썼고 자신의 책과 물건을 나눠 주었다.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의 봉사도 포하모디어 있었다. 언니는 내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고 관심조차 없었던 부분에 대해 내 생각을 묻곤 하였다. 통일과 북한에 대해서 자신이 공부한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그런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삶에 직접적인 유익을 주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부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언니는 곧 졸업을 했고 나는 이듬해 학원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서울 U-SFC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SFC의 역사와 강령, 신조에 대해 배웠고 개혁주의 새계관을 비롯한 수많은 강의를 들었다. 알돌로서 학기마다 작은 모임을 인도했고 방학 땐 수련회와 SFC 학교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전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복 8-9시간 걸려 지방에 내려가 밤을 새며 모임을 하고 다시 새벽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SFC에 대해 말해주고 SFC가 내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한 사람의 삶이었다. 다른 선교단체에 들어갔더라면, 혹은 선교단체에 들지 않았더라면 좀 더 편히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에 SFC와 정아 언니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모두 감사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SFC를 통해 언니의 삶을 보고 배웠으며, 동시에 그의 삶을 통해 SFC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해 주었고 참 소망을 붙들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고백했듯 예전에는 내가 SFC를 지킨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래서 부담스러웠지만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휴학을 하고 올해 초 다시 복학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내가 SFC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SFC가 내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SFC 덕분에 시련과 위를 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SFC는 그것을 깨닫고 스스로 경계하도록 나를 자극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되고 점점 개인적인 삶에 매몰되어 가는 나로 ㅏ여금 위기를 인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다시 진짜 소망을 붙들라고 한다. 그것이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적인 것으로만 남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통해 얘기하라고 한다. 설령 지금은 그러하지 못할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체념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래서 내 안의 소망이 메마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을 대주는 것이 SFC이다. 이것이 현재 내가 SFC 운동원인 이유이다.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생각하니 처음엔 막막함과 부담감을 안겨주었던 이 글의 주제가 고맙게 느껴진다. 단순히 관성의 법칙에 이끌려 SFC 활동을 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이 매력적인 주제를 던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