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삼진 목사
총회교육위원회 대표간사
SFC 40년사 편찬위원회 주간
70년대 초기의 대학 SFC를 중심한 학원복음화운동은 SFC역사의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서울, 부산, 마산, 대구 등 중요한 대도시의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원복음화운동으로 말미암아 70년대는 SFC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변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일로 말미암아 각 대학 SFC조직, 지도자 교육과 훈련, 대학생 인구의 저변 확대 운동방법론 연구와 프로그램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 시기에 헌신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그후 SFC동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70년대 대학 SFC를 통한 학원복음화 운동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살핌으로서 대학 SFC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1. 70년대 대학SFC의 활성화의 시작
SFC에서 대학생 운동의 시작은 1967년경으로 보는 것이 옳다. 1967년은 SFC가 20주년을 맞는 때인데 20년사 편찬, SFC연감 발간, SFC주일 제정, 신문 발간 등의 역점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SFC 대학생들 모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생 중심운동의 시작은 1967년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면 1970년대 대학 SFC 활성화의 요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먼저 1970년대 대학 SFC 활성화의 시작은 경기지방에서의 대학생 모임의 조직화와 전국의 대학생 협의회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지금도 큰 차이가 없으나 60년대 중반 우리 교단의 취약지역도 수도 서울이었다. 교단이 1960년 합동할 당시, 23개 교회였던 경기지방은 충현교회를 비롯한 다수의 교회들이 합동측에 잔류하게 되고 11개 교회만이 환원하게 되어 교단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합동과 환원의 충격으로 뚜렷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경기노회와 경기지방 SFC 약체를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에 1967년 3월 26일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각 교회 대학부의 연합운동을 위해 서울지방 SFC 대학생회를 조직하였다.
초대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구문회(홍천) / 총무:정운진(영천) / 서기:민현식(서문) / 회계:김정옥(중앙)
/전임위원:김은애(서문),김항규(중앙),정도식(동일),이정식(홍천),박귀복(영천)
이들은 창립이후 월례 정기모임을 가져왔는데 5월에 크리스챤의 현실 , 6월에 본 훼퍼 비판 (김의환목사, 6.11, 서문교회)등의 강연회를 갖게 되어 침체해 있던 경기지역 대학생들의 신앙운동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 해 제61회 정기위원회(1967.2.28,대구)에서는 신앙 향상, 지도력 강화, SFC조직 연구, 운영방안, 재정문제 등을 위해 대의원 수양회를 계획하였다. 이 대의원 수양회는 8월 12일부터 4일간 한국기독교 수양관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30여명의 대학생이 모여 진지한 토론을 가졌다. 이 협의회의 강사는 다음과 같다.
민영완 목 사 / 예배
이근삼 박 사 / 기독교 윤리
홍치모 교 수 / 1967년도 신앙고백 비판
최해일 강도사 / 이스라엘 종교에 나타난 신앙의 제형태
이 협의회에서는 강의와 그룹별 토의, 배구대회, 캠프파이어 등을 통하여 대학생 모임의 새로운 기점을 마련했다. 서울지역과 SFC의 이러한 노력과 연계되어 당시 부산에서는 고려신학교 대학부 SFC가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67년 6월 13일의 일이었다 (회장:반풍충 / 총무:김창동 / 서기:제의홍 / 회계: 김점용). 이들은 창립 축하예배를 갖고 지방 및 지구 SFC 위원들과 연석 좌담회를 갖고 학원복음화를 위한 협력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SFC 초창기 중요한 참여를 했고 60년대 SFC모임에서 자주 강의와 설교를 했던 이근삼 박사는 보수신앙의 필요성과 SFC 운동의 발전의 제 문제 에서 SFC 운동의 발전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한 바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신앙운동은 대학생만의 신앙운동으로 전개하는 것이 좋겠고,
신앙강좌, 전도운동, 교회봉사, 사회봉사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다.
(2) 매주 일정한 장소에서 정기집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
(3) 계절적인 수양회는 계승하는 것이 좋다.
(4) SFC 회원은 각 대학에서 기도회와 전도에 힘써야 한다.
(5) 체육회, 음악회, 예술회, 학술회 등을 통해 다각적인 전도의 기회를 제공하고 달란트를 십분 발휘하도록 한다.
(6) SFC 멤버중에서 성역지망자가 나오고 학생신앙운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추진시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7) SFC 회관과 SFC 유급담당자가 필요하다.
(8) SFC는 국제적인 보수주의 대학생 신앙운동 단체와 결연을 맺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9) SFC 출신 학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10) 대학생 상대의 문서운동이 긴급하다.
이같은 제안은 전국학신 제11호에 소개되어 공론화(公論化)되었는데 지금부터 25년전에 제안된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대학생 중심의 신앙운동으로의 전환은 1967년이래 줄곧 발행 되어온 "전국학신" 을 통한 문서운동의 역할이라고 하겠다. "SFC 40년 사료"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 위원회가 해마다 결정하고 계획하고자 했던 중요한 관심이 문서운동이었다. 이 문제는 43차에 걸친 정기대회에서 12회, 210차에 걸친 전국위원회에서 38차례에 걸쳐 논의될 만큼 신앙운동에서 절박한 것이었다.
또 이는 당시의 신앙운동 방법이 제방향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서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고려파 초기의 "파수군" 이나 "진리운동" 을 통한 문서운동이나, 16세기 루터나 칼빈의 문서를 통한 개혁운동의 방법론을 닮은 것이라 하겠다. "전국학신" 은 격월로 정기적으로 간행하려 했으나 인력부족, 자금부족 등이 겹쳐 매호마다 산고(産苦)를 겪어야 했고, 간헐적으로 간행되어 왔다. "전국학신" 은 1970년 제19호 발간으로 중단되는 듯 하다가 1971년 4월 15일 뜻있는 이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으로 인해 1971년 4월 15일 일간신문 크기 4면으로 크게 발전되어 속간하게 되었다. 이 "전국학신" 은 그후 6회에 걸쳐 발행되는 가운데 대학 SFC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 무렵 대학 SFC 운동을 주도한 세번째 요인은 김만우 간사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김만우 간사는 연세대와 연합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신학교 본과에 수학했는데 재학중 부산에서나, 서울 성원교회 사역시에 SFC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했다. 그는 동문들의 지원 아래 1971년 당시 지도기관이던 총회 교육부의 결의로 간사로 선임되고, 교단 총회로부터 간사로 인준을 받아 SFC 최초의 간사로 헌신하게 되었던 분이다. 사실 이 SFC간사 제도에 청원은 1958년 제9회 정기대회에서 건의가 있었는데 1971년에야 이 일이 성사된 것이었다. 김만우 간사는 비록 SFC가 전임사역이 아니었으나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대학 SFC 활성화, 신문발간, 지도자 수련회, 전국 대학생대회, 등록카드 및 학원복음화 카드 등 문서발간, SFC편지 발행 등 여러 부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국이나 지방의 수양회마다 SFC-Time 을 통해 운동원들에게 SFC의 역사와 정신, 신앙자세를 다지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제시해 왔는데 이 시기에 대학에 몸 담았던 이들이 그 후에도 SFC 세대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점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의식있는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 하였다.
이 간사제도는 시행 제2년차인 1972년에 보다 확장되었는데 제 82차 정기 위원회( 1972.2.24, 서울성원 교회당)에서는 각 지방에 간사제도를 두기로 함으로써 더욱 발전을 보았다. 6월 4일에 열린 제 83차 위원회(경주교회)에서는 협동간사로 부산지방 변의남, 장희종, 경남지방 김동식, 경기지방 배성환, 진주지방 강영순, 전국 협동간사 이흥우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 협동간사는 종래의 협동총무 제도를 통하여 선배들의 경험들을 나누었던 것보다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현상인데 지도자 수련회(Leader's Conference) 제 1회 전국 대학생대회(1972.10.23-25,서울)등으로 연결되면서 보다 규모를 갖추어갔다. 이것은 대학생운동의 지방에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2. 70년대 대학 SFC의 학원복음화 운동의 전개
70년대의 학원복음화 운동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활발히 전개 되었다. 이것은 1967년 이후 수년간 서울 학신 대학부의 활동으로 인한 축적된 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3월 16일에 학원 SFC 조직을 위한 간담회가 있었다. 각 대학에 SFC 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연세대학교에서 4월 11일에 처음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는데 1970년 8월 25일의 "전국학신" 보도에 따르면 학교 당국의 인가 문제로 고심하던 끝에 "칼빈사상 연구회" 로 등록하게 되었고 30여명이 모였다. 이때 황현조가 위원장을 맡았는데(정외과 4) 그는 황철도 목사의 아들로 재학 중 서울 지구와 경기지방 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고 속간된 "전국학신" 의 22호 이후 주간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70년대 학원 복음화운동 전개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다른 여러 대학도 SFC 조직을 위한 몸부림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1971년 3월 1일과 8일에 걸쳐 각 학원 SFC 각 캠퍼스로 확대하기 위한 간담회로 모였으며 3월 14일에 발기 취지문 작성과 활동내용을 보다 깊이 토론하는 준비모임이 있었다.
3월 22일에는 학원 SFC연합 창립발기회가 있었는데 강영순 회장(고신대, 서울학신 대학부 회장)의 사회로 간하배 선교사가 "SFC 본질" 이라는 제목으로 메세지를 전했다. 2부로 연대 SFC 김동건 회장의 사회, 박현희(이대)의 강령제창, 강용원(서울대)의 경과보고, 이성혜의 취지문 낭독이 있었다. 학원 복음화운동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이 땅의 학생운동은 반항과 저항의 운동으로 일관되어 있다. 일제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항 공산세력의 학정에 대한 반항 그리고 오늘날의 현 정부시책에 대한 소위 알레르기적 반항 등은 반항 이 곧 이 나라 학생운동의 전통적 특성으로서 정형화(定型化) 되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뿌리 박혀온 외세와 권위주의적 통치권에 대한 한국인의 고질적 피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SFC 운동은 이러한 외부체제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 운동이 아니었다. SFC 운동은 이 나라 사회의 갖은 혼란과 부정(否定)과 방황의 세대들에게 오랜동안 압박과 구속만을 강요 당해 온 이 땅의 백성들에게 새 하늘 새땅 을 약속해 주고 진리의 불기둥 말씀의 구름기둥이 된 창조적인 학생운동이었다.
우리의 강령 속에 나타난 국가와 사회의 복음화 학원의 복음화가 바로 그 정신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훌륭한 이념과 목적을 가졌었던 우리의 SFC운 동이었지마는 이것이 사회와 학원 속에 침투될 정확한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태동의 울음소리를 터뜨린지 이십 여년이나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침체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을 무엇으로 변명해야 할 것인가?
타 교단의 학생운동은 지금 얼마나 학원사회에서 열을 뿜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 교단의 SFC 운동만이 유독 그렇지가 못할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 우리는 누구를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일어서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행동에 옮길 때가 왔다. 눈을 높게 뜨자. 안으로만 향해 왔던 시야를 넓디넓은 밖의 세계로 돌리자.
지금 우리앞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될일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의 강령을 다시 찾자!
뚜렷한 방향, 확고한 가치관을 찾지못해 방황하는 오늘날의 상아탑속의 유랑의 무리들을 우리의 운동의 대열속에 참여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오늘 우리는 흩어졌던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의 나팔소리와 함께 출발하고자 한다.
주저와 망설임은 비겁자의 소리이다. 다같이 힘을 합하자. 우리는 행동이다!
1971년 3월 22일 서울학신 대학부 학원복음화운동 발기위원회
이때 황현조(연대 SFC 위원장)의 학원복음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진로 라는 주제의 연구발표가 있었는데 매우 진지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힘을 가한 또 하나의 노력은 부산지방 SFC 재경 유학생회라 할 수 있다. 사실 SFC-Man이 어디로 가든지 지역 SFC와 대학에 속해야 했으나 1966년 부산시 고교 SFC 연합회 의 창립 이후 고교 SFC에서 일한 이들이 경기지방의 대학에 SFC 조직이 없던 당시로서는 신앙운동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1971년 4월 총회를 했는데 김봉재, 임정근, 윤선옥 등이 핵심적으로 일했다. 또한 이들은 나실인 이라는 회보를 통해 회원 동정과 학원복음화 운동에 대한 주장 등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대학생 운동은 부산지역에서도 크게 진전을 가져 왔다. 부산지방 SFC 대학부 발기회가 제 6회 부산 하기수양회(1970.8.3-7,김해가락교회)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는 김만우 전도사 주도로 시작되었는데 부산시내에 있는 대학생들의 활동을 위해 조직적인 체계를 세우려는 의도로 모인 이 발기회에서는 각 교회 대학부 조직을 강화하여 대학 SFC연합회를 구성하자는데 합의했다. 이를 위해 9월에 SFC대학생 특별 세미나를 개최하고 이 기간 상세한 계획, 조직을 논의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산의 부산대, 동아대, 고려신학대, 한성여대(경성대의 전신), 부산교대, 수산대 등에 재학 중인 SFC 운동원들이 기독대학생 세미나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1회 SFC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독대학생들의 내일의 사명의 중대성을 자각하고, 어제를 냉철히 투시하고,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하여 기독대학생들의 자세 확립이 절실히 요망된다." 고 생각하고 기독대학생의 자세 확립 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다.
1970년 11월 11일 - 14일 YWCA회관(지금 초량으로 옮겨 오기전 대청동 남일국민학교 앞에 위치)에서 사흘 동안 강연회와 주제 발표회, 특별 순서 등을 갖게 되었다. 이때 이근삼 박사가 "대학생의 인생관 대학생의 신앙관" 을, 박기순 교수(동아대)가 "대학생의 자세 확립" 을 주제로 하여 강연을 했다. 마지막 날에 개최된 학생 세미나에서는 권순렬이 "대학생의 자세확립" , 최명가의 "대학생의 현실참여" , 김성식이 "대학생의 위치" , 박영관이 "신앙운동의 어제와 오늘" 을 주제로 발표하고, 참석한 이들이 진지한 토의를 가졌다. 이때 참여한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
박대규(지방위원장) 박영관(부산의대)
김성식(동아대) 권순렬(부산대)
이형민(고신대) 장의원(부산대)
한기원(고신대) 노상원(동아대)
최성희(부산대) 김명숙(부산교대)
최명자(고신대) 손혜숙(부산여대)
부산지역 SFC 대학생 연합회는 창립 이후 매월 정기집회를 가져왔는데 신앙강좌 등을 통해 신앙과 신학적인 안목을 크게 넓혀 나갔다. 그후 각 대학 SFC 조직으로 규모를 갖추어 갔는데 1975년의 회원 주소록을 기준으로 당시 부산 대학생 연합회의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대 108 부산여전 17
부산여대 11 동아대 34
복음간호 32
이러한 부산에서의 흐름과 때를 같이하여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70년 마산교대 SFC 조직과 때를 같이하여 1971년 9월 29일에는 마산대 SFC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여러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마산지역에는 마산결핵원에 와있던 OMF선교사 패티슨 박사를 중심으로 성경공부, 토의, 찬양 등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1970년대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운동의 본격화는 이러한 노력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1971년에는 여러 대학에 SFC가 조직되었는데 이화여대가 4월 8일에 (1971.4.8. 이대 본관 에다기도실에서 박현희의 사회, 최해일 목사의 설교로 진행하고, 회장:박현희(도서3),서기:이성혜(의예2)를 선출했다. 20여명의 참석자들이 총회후 간담회 가졌다.), 북대가 4월 16일 (1971.4.16. 성남교회당에서 창립 총회를 가졌고 한학수 목사가 "학업과 신앙을 병행하라" 라고 설교하였다. 위원장:김성수,부위원장:신명희, 총무,서기:김길곤, 회계:박영숙 지도교수: 병연(농대교수))에 달아 조직되어 대학 SFC 운동의 열기가 크게 더하였다.
이러한 대학생 중심의 신앙운동의 시작과 전개는 1971년 10월에 있는 제 1회 지도자 수련회를 통하여 더욱 내실을 다져가게 되었다. 이 지도자 수련회는 학원복음화 운동이 많은 결실을 얻고 있던 1971년 10월 15일부터 4일간 부산 기독교수양관(동래식물원內)에서 전국간사, 위원, 지방위원 등 48명이 참석했는데 "우리의 사명과 내일의 좌표" 를 주제로 강의와 기도와 연구, 토론과 훈련으로서 학생신앙운동의 현안문제와 내일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 모임은 SFC 조직, 프로그램, 학원복음화 실천방안, 종래 예배와 기도중심의 수양회와는 달리 SFC 지도자들이 모여 학생신앙운동의 의의(강령해설), 조직연구, 재정문제, 프로그램 문제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강의와 토의를 통해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이 모임은 김만우 간사의 기획으로 총회 인준 후 처음으로 준비한 모임이었는데 교회 SFC와 학원 SFC와의 조직 갈등문제를 다루었을 뿐 아니라 활동프로그램과 학원복음화 실천방안에서 SFC 전도카드를 통한 복음전도 방법들을 제시했다. 이 전도방법은 70년대 중반까지 각 대학과 교회에서 즐겨 사용한 바 있다.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대상선정
(2) 대상을 위한 기도
(3) 전도에 대한 확신과 사명감을 지닐 것
(4) 대상자와의 접촉점을 발견할 것
(5) 문서제공
(6) 대상자를 지도자와 접촉시킬 것
(7) 모임에 안내
(8) 더 많은 운동원들과 사귈 수 있게할 것
(9) 교회 및 교역자와 연결시킬 것
(10) 대상자가 제기한 문제점, 의문점을 파악할 것
(11) 다른 기관에 지원을 요청
(12) 교회에 출석시킬 것 <SFC표준문서관리/최해일 목사>
이러한 강의외에 KSCF,.CCC, UBF, Navigathor 등을 비교하여 역사와 조직, 교재와 프로그램 등을 살핀 배성환 총무의 타 기독학생운동의 현황과 비교연구 도 일품이었으며 이는 당시 핵심적인 운동원들의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임은 경주(1972.6.4-6),대구(1973),부산(1974)등에서 계속되었다.
서울학신 대학부는 수 차례에 걸쳐 "내일을 위한 모임" 이 개최하였는데 제 6회 모임은 "보수의 정립" 이라는 주제로 1971년 11월 23일-24일 서울중앙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강사는 차영배, 오주영 목사, 김만우 간사였고 24일 밤에는 구국철야기도회도 가졌다.
또한 제1회 전국대학생대회가 1974년 4월 4-6일에 서울 YWCA캠프장에서 있었다. 이것은 대학 SFC의 결성에 따른 평운동원의 증가와 이들을 위한 모임으로서 지도자 수련회와 또 다른 의의가 있었다. 당시 김만우 간사는 SFC의 기본 프로그램으로서 동기수양회(겨울), LEADER(봄), 각 지방 하기수양회(여름), 전국 SFC 대학부학생대회를 겸한 지도자수련회(가을)등을 기획했는데, 각 대학에 정착하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지도자 수련회는 각 지방별로 개최키로 함으로써 경남(1973. 2.26-28)등에서 알돌수련회라는 형태의 모임을 가져왔으나 그 효용성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이 지도자 수련회는 1975년 거창수양회에서 SFC 아카데미라는 형태로, 지도자 교실로 이어졌고 그 후, 부산지방(1976.10) 등에서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80년대에 와서 대학 SFC 대표자 모임 등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