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SFC 역사

'80년대 SFC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전망 [교회건설, 1991년]

노랑 테니스 공 2023. 10. 11. 17:18

권오헌 간사

들어가면서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한 시대를 바라보는 사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90년대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80년대의 10년 간이 과연 벌써 그 의미를 평가할 만큼 시간이 지났는지는 의문이 많다. 80년대에 SFC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이들이 지금도 여전히 여러 면에서 SFC와 많은 관계를 하고 있는 상황이 더욱 평가를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되도록이면 가치 평가는 줄이고 80년대에 SFC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만 짚어 보고자 한다. 물론 어떤 사건이 중요하다고 보느냐에 이미 평가가 포함되지만 그것은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어차피 이 글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아닌가 하기 대문이다. 80년대 SFC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겠으나 굳이 표현해 본다면 격동의 80년대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1. 학원 선교 사역을 위한 간사 제도의 정착

1) 간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헌신자들

80년대 들어 오면서 시작된 제일 큰 사건은 SFC에서 성경적 학생운동의 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생애를 걸고자 하는 이들이 헌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SFC의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들이 있겠으나 종합한다면 역시 강령 구현 운동으로서의 개혁신앙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학생신앙운동의 이중구조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79년에 강영순 간사님이 최초의 전임 간사로서 전국학생신앙운동 정기대회의 인중을 받아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는 간사의 추천권이 전국 위원회에 있었고 학생들이 후원 구좌를 모아 간사님의 사역비를 충당했는데 이 후원금 모금의 총책이 후일 대표간사를 지낸 오병욱 목사(당시 전도사)였다.

80년에는 서울 사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안용운 선배가 강영순 간사님의 도전으로 교직을 그만하고 또 헌신했다. 당시의 전국위원들은 강 간사님(당시 강도사) 한 분의 생활비도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또 한 분의 간사가 더 헌신하는 것을 재정 부담 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지만 그만큼 당시의 SFC는 재정적으로 취약했다. 그러자 안용운 선배는 자비량으로 사역하기를 요청하여 간사로서 인준받게 된다. 자신의 퇴직금 300만 원을 간사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안용운 간사님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서울대 SFC가 조직이 되고 본격적인 대학 선교 차원의 SFC 정책이 수립되기 시작한다. 당시 전국 SFC의 조직이나 규약 상으로 임의단체나 마찬가지였던 대학SFC가 전국 정기 대회에서 정식 회원으로서의 멤버십을 얻게 된 것도 안 간사님의 헌신과 안 간사님의 캠퍼스 사역에 영향을 받았던 이세령 위원장(82년 전국위원장, 후에 간사로 헌신함)이 대전 생수 기도원에서 열렸던 전국 정기대회에서 지역별 대학 SFC 연합회를 지방 SFC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킴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초기의 강영순 강도사님 한 분 간사에서 강영순, 안용운 두분 간사 체제가 되었다가 강영순 간사님이 전국위원회와 선배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차 임기인 2년을 마치고 간사직을 물러나게 되어 다시 한 분 간사체제로 되었다가 이성구 전도사님과 전성준 전도사님이 합류하여 전국은 3분의 간사가 서울(안용은), 대구(전성준), 부산(이성구)을 분할하여 사역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대구의 전성준 간사님은 전국위원회가 선발하거나 요청한 간사가 아니라 당시 경북지방(지금의 대구, 경서, 경북을 합한) 동문회에서 대구지역에도 간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삼고초려해서 일광에서 사역하시는 전성준 선배(당시 신학대학원 졸업반 전도사님)를 모셔온 것이다. 

전성준 간사님은 가지고 온 책 꾸러미를 다 펼칠 수도 없는 좁은 월세방과 부족한 생활비의 고생을 무릅쓰고 사역을 시작했다. 전 간사님의 사역으로 대구 지역 U-SFC가 교회 SFC 출신들의 학원 내의 교제라는 단순한 모임의 차원을 넘어서서 연합과 사역의 차원으로 올라섰다고 할 수 있겠다.

최초의 지역 대학생 수련회가 금식 수련회로 갈멜산 기도원에서 열렸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마산과 부산, 서울에서도 대학생을 위한 자체의 겨울 수련회가 정착된다. 동문들의 노력과 전 간사님의 헌신을 통해 간사 사택으로 아파트가 마련된 것이 83년이다.

이때부터 간사팀의 개념이 생기게 되었고 안, 이, 전 세 분의 간사님은 동갑내기 간사로서 이미 하나님의 SFC를 향하신 예비된 팀이었다. 이 세 분의 팀윅이 83년 3,000명 규모의 전국 수련회에서 잘 발휘되었다. 물론 이 세 분이 사역을 하시면서 고생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봉투 쌀을 사러 다닌 사모님의 얘기 같은 것도 다 지금은 전설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세 분의 간사님은 간사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교단 총회에 이사회 성격의 SFC 입장을 대변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요청한다. 당시에 SFC는 총회 교육부의 한 분과로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교단 총회의 상설 기도로 SFC 지도위원회가 생기게 된다.

지도위원회가 생기자 처음에는 간사팀과의 위상 관계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지도위원회 제도와 관련해 가타부타 말이 많았으나 분명한 것은 고신 교단의 학원 선교에 관한 관심의 향상이 이 제도를 통해서 교계 지도자들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85년에 간사 공채 1기라 할 수 있는 안병만, 강학근, 곽창대, 김희택, 김종선 간사의 입각으로 간사의 사역은 본격적인 학원 사역의 장을 맞이하게 된다. 이전까지의 전국위원회와 수련회 중심의 사역에서 캠퍼스 전도와 제자훈련 사역이 본격화되었다. 이로부터 기존의 지구와 지방의 조직 외에 행정구역을 다른 지역이라고 하는 보다 상위의 조직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지역 책임자에 대한 노회들의 후원이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당시의 지역을 서울, 대구, 부산, 마산, 광주였다.

2) 평신도 간사의 사역

사무 간사 정도의 수준에서 시작한 평신도 간사의 헌신들이 본격화된 것도 80년대 학생신앙운동의 중요한 변화이다. 신학을 이수하지 않았으므로 협동간사란 명칭이 공식 명칭이 되었지만 실제로 전임으로서 모교의 선배로서 현장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역한 평신도 간사들의 등장은 학생신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전국의 대학 학생신앙운동의 성쇠를 살펴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대학의 선배가 후배를 위한 사역에 동참한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의 운동 역량과 양적 성장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단발로 끝날 것 같았던 안요웅ㄴ 간사의 사역이 몇몇 자매 사무 간사의 헌신에 이어 유영업 간사의 헌신으로 이어진 형제 협동 간사의 사역으로 확대되자 평신도 간사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리게 되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평신도 간사들이 장기 사역을 꿈꾸고 있으며 80년대 후반에 와서는 형제 간사들의 신학이수와 장기 사역을 향한 진로의 결정이 많아짐에 따라 대학 졸업, 평신도 간사 사역, 신학 이수, 장기 간사 사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역의 형태가 정착되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3) 학원 사역자로서 간사의 헌신 시작

80년대는 간사들의 헌신의 이유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며 나타난 시기였다. 어떤 간사는 수양회에 대한 애정으로 다른 이은 후배 전국위원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또는 학생신앙운동에 대한 나름의 다양한 이해를 배경으로 여러 스타일의 지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은 하구언 사역자로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학원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이 모든 간사들의 헌신의 핵심적인 이유로 굳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최근의 간사 헌신자들의 간사지원 소견서에 나타난 내용들의 놀랄만한 일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거쳐 지나가는 몇 년의 소비적인 과정이 아닌 평생 사역의 장으로서 학원과 학생신앙운동을 이해하는 간사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후반이었다.

2. 학원 SFC의 강화

학생신앙운동은 원래 지역교회의 연합운동이었다. 70년대 초에 들어오면서 대학별로 학생신앙운동이 모이는 곳이 있었으나 이는 전국 조직과는 상관이 없는 임의 단체였고 지방(노회 단위 SFC조직)에 따라서는 개체 대학 SFC가 지구(시찰단위 SFC조직)에 속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지금은 학원 SFC 운동원들이 대거 참가하는 여름 대학생 캠프도 처음에는 고신 교단 대학부들의 모임이었다.

이는 이 모임의 주최가 처음부터 전국위원회였고 당시 전국위원회는 지방 조직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학원 조직은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초기의 학원 SFc를 구성하는 운동원들도 대부분 지구나 지방을 통해서 SFC 위원으로 섬겼거나 수양회를 통해 SFC에 참여했던 지역 교회 SFC 멤버들이었다. 처음에는 강령이 표방하는 학원 복음화에 대한 부담감에 의해 단순한 신우회 형태로 모이다가 서클로 등록이 되고 서클로 활동을 하다가 학원 사역에 대한 간사들의 헌신과 발 맞추어 본격적인 학원선교단체로 체질이 강화되어 갔다.

1) 대학생 연합회의 전국 SFC에서의 총대 파송

1982년 초에 대전 생수기도원에서 모인 전국정기대회는 이미 지역별로 조직이 되어 실제적으로 SFC 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 연합회에 전국정기대회의 총대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로부터 전국 SFC는 교회 조직과 학원 조직을 거느린 2중 구조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전에도 이미 지역별로는 대학생 연합회가 간사들의 사역 대상이었고 간사 헌신자들 중에서 학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뛰어 든 이들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전국 SFC는 규약상 SFC의 전통성을 이어받은 최고의 의결기관이었기 때문에 이 결정은 후일 SFC의 역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그 결정이 있었으므로 학원 SFC가 지속적으로 전국위원회와의 유대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정의 영향으로 80년대 말에 들어오면 고신교단 소속이 아닌 전국위원이 등장한다.

2) 서울대 SFC의 창립

안용운 간사의 헌신으로 82년도에 서울대 SFC가 창립된다. 후에 전국위원장이 된 권수경 강도사(당시 서울대 철학과 재학)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서울대 SFC가 창립되자 "개혁신앙" 발간으로 대학 SFC 문서운동의 선두주자로 전국의 각 대학들에 자극을 주었고 서울저역 USFC를 조직하는 데 일익을 감당하는 등 당시 SFC의 방향에 여러가지 영향을 끼친다. 거의 동시에 고려대와 경희대 등도 조적적인 면모를 갖춘 학원 SFC 활동이 일어난다.

3) 지역별로 USFC가 확대되기 시작 (진주, 마산, 서울, 대전, 광주)

70년대에는 대구와 부산에만 USFC가 있었고 지금과 같이 전국적으로 USFC조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80년대에 들어서면서이다. 마산과 광주와 진주 뒤이어 대전에 대학학생신앙운동 연합회가 조직되었고 이 움직음은 계속되고 있다. 89년에는 대구지역 대학 학생신앙운동 연합회가 대구와 경산으로 분리되었고 조만간 포항, 제주, 울산, 전주 등지에서도 연합회가 생길 조짐이 보이고 있다.

4) 대학생 대표자 모임 시작

서울대와 이화여대 SFC를 중심으로 서울 기독교 수양과네서 제1회 대학생 대표자 모임이 열리었다. 처음에는 방향성의 정립이 안된 상태로 그냥 모이는데 의의를 찾았으나 차차 학원 SFC의 정책과 한 해의 방향성을 일치시키는 모임으로 굳어져 갔다. 특기할 일은 광주 동명교회 수양관에서 모였던 제7회 대학 대표자 모임에서 "언약문"이 채택된 일과 영동교회에서 모였던 제8회 대회 때 "학생신앙운동 협의회(대학학신 전국협의회, 이하 학신협)"이 결성된 일이다.

5) 학신협 결성

광주에서 모인 제 7회 대학 대표자 모임에서 논의되기 시작해서 서울 영동교회에서 모였던 제8회 대학 대표자 모임에서 전국 규모의 대학 SFC 연합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학신협의 결성은 80년대 대학 학생신앙운동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신협의 결성은 개체 대학 학생신앙운동이 신앙운동의 전국적인 연대에 대한 강한 필요를 느낀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전국 규모의 대학 학생신앙운동 연합이 구성될 수 있을 만큼 조직의 역량이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70년대 초에 몇몇 대학에서 신우회 형태로 대학 학생신앙운동이 시작된 이래 실로 20년 만의 결실이었다.

6) 개혁주의적인 사회 참여 연구 그룹으로서의 개실천의 등장

70년대의 유신 시대와 80년대의 정치 변환기를 거치면서 득세한 운동권 세력과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복음주의적인 학생운동의 진영에 이 시대에 현실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반성과 자성의 소리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나타났다. 학생신앙운동에서도 조직화되지 않은 세력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진 소그룹들이 있었는데, 88년에 대구지역 대학 학생신앙운동에 '개혁신앙실천모임'이란 사회현실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연구하는 구룹이 등장하면서 엮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스터디 그룹이었으나 차차 대자보 논쟁, 피케팅, 스티커 붙이기 등으로 운동 역량을 키우며 지금은 전국적인 지지를 얻는 그룹으로 성장했다. 거의 동 시기에 출발한 학신협과의 좋은 관계가 상승 작용을 했다.

7) 연합 운동의 조류

8) 학복협과 선교한국을 통한 SFC의 대외적 등장

3. 교단과의 관계

1) 총회 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회 발족

이성구 간사가 대표간사로 있을 때 당시의 학생신앙운동과 총회의 관계는 총회의 교육부 산하의 한 부서로서 CE, 여전도회 연합회, 주일학교 연합회 등과 같이 소속되어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성구 간사는 학생신앙운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 총회 차원의 격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총회에 학생신앙운동의 지도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총회 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회가 교육부에서 독립되어 독자적인 학생신앙운동의 정책과 인사에 관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지도위원회는 구성되었으나 학생신앙운동에 지속적으로 관계하던 분들로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아니었기에 초기에는 간사들과 지도위원들, 전국위원들과 지도위원들 간에 견해차가 노정되기도 했다. 조직의 운영에 있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총회 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회가 총회의 상설 기구로 활동을 시작함으로 고신 교단의 목회자들에게는 학생신앙운동에 대한 이해와 지원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었다. 이는 고신 교단으로 보거나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기를 원하는 학생신앙운동의 입장에서 보거나 다 하나님의 선하신 간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노회 지도위원회 탄생과 노회별로 전임 간사를 후원

1988년 고신 교단 총회는 SFC의 학원 선교 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노회마다 노회 지도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1990년 총회는 각 노회가 한 명씩의 전임 간사를 재정 지원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총회 지도위원회가 총회만의 상부 기관으로는 학생신앙운동의 전체 조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고 후원하기 어렵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노회별 지도위원회는 이제 거의 22개 노회 전체에 다 생겼고, 노회별로 한 명 이상의 간사를 후원하는 것은 몇몇 노회에서 시작되어 전체적으로는 아직 시행되지 않았지만 노회 학생신앙운동 지도위원회의 구성이 학생신앙운동과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엮어주는 끈이 될 것은 분명하다. 

총회 지도위원회가 겪었던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 학생신앙운동에 대한 이해와 학원 선교 사역에 후원을 하는 교량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학생신앙운동으로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들을 돕는 교량이 될 것이다.

3) 노회가 지역 간사를 위한 후원

현재의 제도는 전국이 8개 정도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 지역마다 작게는 1개(전라)에서 많게는 6개(부산) 정도의 노회가 그 지역 간사들의 책임자인 지역 간사의 후원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지역의 노회가 간사를 후원하는 제도는 1981년 경북노회(현 대구노회와 경서노회를 포함한)에서 학생신앙운동 선배 장로와 목사들의 건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에 이미 경북노회 교육부는 파트타임 간사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노회가 이 결정을 하기가 더 쉬웠다.

90년 총회의 결정에 따라 조만간 모든 노회가 노회별로 한 명 이상의 간사를 후원하게 된다면 이는 한국 교회사상의 교회가 학원선교를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획기적인 모델이 제공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4. 전국학생신앙운동

1) 전국 동기수양회의 중지

해마다 열리던 전국학생신앙운동의 동기수양회는 1981년 1월의 거창고등학교 수련회를 끝으로 막이 내리게 된다. 이 수련회는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하기 수련회로 체제를 바꾸어 83년에는 광주 경신여고에서 3,000명이 86년에는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5,000명이 모였으나 89년 대회가 열리지 못한 것을 계기로 전국 학생신앙운동이 주관하는 중,고,대 연합 수련회는 막을 내리게 된다. 

마땅한 장소를 구하기 어려운 점이나 운영의 어려움 등이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간사들의 의식의 변화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더 이상 전국위원들만으로나, 선배들의 도움만으로는 치룰 수 없을 만큼 대회의 규모가 커져서 전임 간사들이 준비하고 뛰어야 하는데 전임 간사들의 의신과 팀윅이 88년 오병욱 간사의 퇴임 이후 대표간사가 없는 체제 속에서는 전국 차원의 중, 고, 대 연합 학생신앙운동 수련회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수양회가 가지는 의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만간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될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 수양회의 폐지로 80년대 학생신앙운동의 중,고등부의 전국적인 유대 의식이 약화된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고 그 영향은 어떤 형태로든지 대학 학생신앙운동에도 미칠 것이다. 

2) 대학생 캠프의 강화

전국 동기수양회가 약화되자 전국위원회의 힘은 상대적으로 여름 대학생대회에 집중되었다. 마침 전국적으로 대학 학생신앙운동의 확장과 대를 같이하여 대학생 대회는 80년대 초의 1- 200명 단위에서 급성장하여 1,000명, 1,500명으로 대회의 규모가 확장되어 갔다. 현재는 대학생 대회만 하더라도 해마다 열리던 전국 학생신앙운동의 동기 수양회 규모를 능가하게 된 정도이다.

3) 학원 SFC와 지방 SFC의 균형

전국정기대회 시에 교회 연합의 22개 지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총대가 작은 대학 학생신앙운동 연합회(8지역)의 발언권이 서서히 강화된 것도 80년대 학생신앙운동 전국위원회에서의 특기할 일이다. 80년대 말에 들어오면 고신교단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학원에서만 학생신앙운동의 사역을 담당한 전국위원들이 나타난다. 90년 1월 부산 동일교회에서 열린 정기대회는 전국 학생신앙운동 위원회에 학원분과를 상설로 두게 되고 학신협 의장이 학원 분과장을 겸임하기로 학신협이 수용하게 된다. 이는 전국위원회가 대학 학생신앙운동의 실제적인 영향력을 인정한 것임과 동시에 학신협이 교회와의 관계정립에 조직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5. 제자 훈련 사역을 위한 출판 사역의 시작

1) 날마다 주님과 발간

84년 6월에 창간호를 발한한 이후 현재 통권 81호가 나왔다. 처음에는 노트는 없이 성경 본문과 해설이 2면이 매일 제공되다가 86년 1월호부터 매일 아침저녁의 2면씩 경건 노트가 추가되어 현재의 부피가 되었고 제호 로고도 몇 번의 수정이 있었다. 초기에는 영어 성경 본문이 실리기도 했으나 한 번에 그쳤고 현재와 같이 개혁 한글 성경과 미니 주식이 해설로 제공되었다. 예화가 손거울이란 이름으로 제공된 것은 91년 1월호부터이다. 출판부의 재정난으로 몇 번의 정간을 고려하는 고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학생신앙운동원들의 경건 생활과 훈련을 위한 지침서라는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고 89년에는 정기간행물로 등록이 되었다. 매월 5,000부가량이 발행된다. 4년간 꾸준히 날마다 주님과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경우 구약 1회 신약 3회 통독이 가능하도록 목표를 세우고 본문을 나누었다. 

2) 교과과정의 완성과 교재 발간

86년 공채 2기 간사들의 선발을 계기로 학생신앙운동의 4년제 교과과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어 몇 번의 시행 착오를 거쳐 현재의 3-7 제자훈련 과정과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 확립 과정 등이 완성 교과과정으로 채택되었다. 이 교과 과정의 완성 후 세계제자도협회와의 연결로 발간된 제자 훈련의 철학 편 교재가 훈련과 성장이고 그에 따른 성경공부 교재가 8권이 발간되었다. 각 과정과 단계별로 복수 교재를 인정하는 교과과정 운영원리에 따라 다양한 교재가 개발되었고 계속 발행 중이다. 89년에는 학생신앙운동 출판부로 문공부에 등록 본격적으로 성경공부 교재 및 경건 서적, 신학 서적, 소책자 등의 발행에도 힘쓰고 있다. 

6. 특수 선교의 시작

8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 각 학원과 지역의 학생신앙운동은 복음화 사역의 효과적인 방편으로서의 찬양과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역별로는 마산의 브라가가 두란노 찬양 사역팀과 같은 형태의 찬양 사역을 시작했고 전임 사역자를 세우게 된다. 대구의 예수노래는 굳 라이프 스타일의 찬양사역 팀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은 이러한 팀들의 사역에 대한 평가가 이른 감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학생신앙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의 후원과 상관 없이 개체 대학 학생신앙운동 내에서도 대학 내의 찬양 문화에 대한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는 주로 부산과 서울 등의 대도시 대학들에서 주도되었는데 부산대학 학생신앙운동의 새노래 찬양단과 경희대의 찬양단은 기억할 만한 움직임이다. 찬양에 대한 학생신앙운동의 관심의 증대는 3집까지 수십만 권이 발간된 시와 찬미의 폭발적인 인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역에 따라서는 찬양 사역과 함께 율동단, 드라마 팀들이 구성되어 복음화 사역을 돕고 있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일은 부산 지역 동문회에서 발간했던 고신대 교수로 사역하는 안민 선배 부부의 성가 테입이다.

7. 고교 SFC의 재등장

부산, 대구, 마산, 울산, 김해 등지에서 고교 학생신앙운동이 새롭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한 때 부산에서만 3,000명을 헤아리던 고교 학생신앙운동은 지도자의 부재로 방향을 상실하는 듯했으나 80년대 말부터 상기한 몇몇 지역을 중심으로 간사의 사역이 재개되면서 학생신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잠재력을 재등장한다.

8. 지역 개척과 간사 파송의 선례

대전에서 열렸던 86 전국 학생신앙운동 하기 수련회를 계기로 김종선 간사가 충청 지역의 간사로 파송된다. 김 간사의 파송이 갖는 의의는 당시의 충청 지역이 독자적으로 간사를 세울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의 후원에 힘입어 충청지역에도 전임 사역자가 파송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교단의 분포가 약한 지역을 향한 학생신앙운동의 새로운 전진으로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강원 지역과 제주, 전북 등지에도 이러한 형태의 학생신앙운동의 사역자 파송이 기대된다.

맺으면서

1980년대의 10년을 몇 자의 글로 요약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학생신앙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면모들을 다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학생신앙운동을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말한 수 없는 운동"이 학생신앙운동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신앙운동의 80년대를 규정하는 한마디는 잠자던 학생신앙운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일깨우심이 있었다고나 할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