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남숙 간사
부산대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부산지역S.F.C.에서 사역하고 계신다.
1. 들어가며 - 어슴프레한 기억 하나
국민학교를 다니기 전이다. 그러니까 70년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는 힘든 살림중에도 늘 책 사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는데 사신 책을 신문지나 문종이 등으로 거풀을 입혀서 보시고는 다른 분들에게도 빌려 주시곤 하셨다. 그렇게 돌려본 책은 언제나 다 낡은 후에야 책장에 꽂힐 정도로 많은 분들의 손을 거쳐야 했다. 책이 귀하던 따라, 아니 책을 살 돈이 더 귀했는지도 모르지만, 그 때에 베스트셀러였던 천로역정이나 최자실 목사님의 간증집, 안이숙여사님의 간증집, 그리고 신구약 문답집 등. 다 낡아서 테이프도 몇 번씩 붙인채로 책장 한 구석에 앉아 그 시절을 말해 주고 있다.
사는게 달라진 요즘은 매달 발행되는 우리말 신간도서만도 이천여권에 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식지 같은 형태의 복사물들은 얼마나 많은지 다 펼쳐서 읽을 수도 없는 것이 요즘의 형편이다. 가난하게 살때야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 제법 산다하면 어떻게 벌고 어디에 쓰느냐가 더 중요한 것처럼 문서 홍수 속에 살아가는 지금은 무조건 만들던 시대와는 달리 잘 만드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이런 현실앞에서 이 글을 쓸 자격이 전혀 없음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같은 주제로 간단하게나마 몇편 쓴 적이 있는 것과 모임을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인해 책임과 의무가 부여되어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의 위력을 절감하는 사람으로 감히 문서운동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민망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문서의 홍수시대라 하지만 문서운동에 관한 자료가 의외로 없는 것을 보며 다만 이 소고가 징검다리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2. 한국 문서운동의 시작
한국 기독교의 특징으로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와 번역되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어느 나라 선교역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그야말로 문서 선교의 대표적 경우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반잡지의 효시인 최남선의 「소년」이 1908년에 창간된 것에 비해 1%에도 미치지 못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1889년에 창간된 「교회」, 1900년에 나온 「사학월보」, 1907년에 「가뎡잡지」 등의 기독잡지를 발행했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또한 1933년 일본 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잡지수가 228종인데 그 중 100여중이 기독교 잡지였다는 것이다. 이왕 나온 김에 덧붙이면 기독교인이 25%에 달하는 최근에는 5000여종의 잡지중 기독교잡지는 50여종에 불과하다는 것이 92년 말의 통계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그 수가 배가 되었다 하나 마찬가지로 일반잡지의 수도 비슷한 비율로 증가되어 비율은 여전히 1%에 그친다. 그나마도 기독교전문서점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세상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측량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는 대형화 되었는데······.
3. 문서운동의 변천사
한 번은 출신학원 S.F.C. 회보의 합본집을 본적이 있다. 70년대 말에 창간되어 80년 비상시국에 폐간되었다가 그 후에 복간되어 지금껏 이어지는데 100호씩 묶은 합본집이 벌써 두권이다. 게다가 마침 그 합본집이 80년대와 90년대로 대충 나뉘어져서 본의 아니게 두 연대별 비교를 하게 되었다.
회보인 만큼 광고나 동정 또 살아가는 얘기 등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기획 시리즈나 기자 보고서 등에서 그 연대별로, 아니 좀더 세분화된 시기별로 회보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것을 통해서 그 때의 문서운동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대 것들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
기독교 학문관, 교회음악이란 무엇인가, 칼빈주의 역사, 농어촌 선교 방향성··· 요즘은 차라리 그 주제에 맞는 추천도서목록을 쓸 망정 16면 회보에다가 내용은 쓸 수 없는 그런 주제들이다. 또 영문으로 된 소책자를 학생들이 직접 번역해서 실은 것도 눈에 자주 띄었고, 백오십원 짜리 라면을 먹던 시절에 기독교도서를 충분히 구입할 수 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요즘처럼 책도 많지 않았겠지만. 어째든 그래서 16면짜리 회보가 단행본의 역할까지도 하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해 본다.
90년대에 들어오면 학원 민주화 투쟁이 peak에 달했던 91년을 기점으로 차이가 있다. 학내 투장이 심했던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는 현 시국문제에 대한 논의가 눈에 띄게 등장한다. 그래서 원론적인 내용보다는 그 원론적인 것을 어떻게 삶으로 살아내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렇기에 한가지 결론을 만들어 내기보다 토론의 장으로서의 역할과 신문처럼 취재 보고의 역할까지도 감당하고 있었다.
최루탄 연기가 학내에서 사라지고서부터 사람들의 정서가 달라져서인지 잔잔한 삶의 감동을 적은 글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 형성에 회보의 중점을 둔 것 처럼 보이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어가는 가운데 코이노니아를 형성할 수 있는 진실된 글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듯 했다.
4. 문서 운동의 종류
문서의 일반적 분류는 뒤로 하고 S.F.C.운동이라는 제한적 시야속에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본다.
(1) 포스터 및 팜플렛
행사 알림이 그 목적인데 조직과 지향하는 바를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예를 들면 S. F. C. 전국대학생 대회 포스터는 학생신앙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선포하는 사람들의 모임임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대학생대회로 모인다는 것이 그 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내용이다.
(2) 주보
원래는 주마다 나오는 것이라고 주보라 하지만 정기 모임순서지와 모임에서 알리는 광고지의 역할을 하는 것들의 통칭으로 사용한다. 또한 모임의 내용과 광고등으로 우리의 조직과 지향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3) 회보
다른 독자를 의식할 필요없이 운동원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회보이다. 왜냐면 우리의 지향점대로 운동원들이 살도록 돕는 것이 회보의 역할이므로 정체성을 끊임없이 애기함과 동시에 가장 주관적인 삶이 나눠져야 한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톨곤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그리고는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렇게 살도록 격려하기도 하는 그러는 속에서 각자의 삶이 진정한 한 공동체의 삶이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문서운동이 전문화 되지 않았을때는 신문의 역할이나 회지의 역할을 회보가 겸임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신문이라면,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자세나 관점을 근본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연구자료집인 회지이고 그 두 가지가 만나는 곳이 회보이다.
무엇이든 알맹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맹이를 담는 껍질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신문과 회지와 회보가 딱 떨어지게 이처럼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할 수가 없지만 기본적 뼈대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신문과 회보와 회지를 겸해서 늘상 볼 수도 없으니까 각각이 그 역할들을 좀 넓혀서 감당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된다.
(4) 신문
앞서 말한 것 처럼 사실보도와 정보제공이 신문의 역할이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그것을 제외한 외부와의 연결에 문서로서는 가장 큰 몫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신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바램은 우리 역량이 일간지를 발행할 만큼이 되어서 세상을 보도하고 아울러 개혁신앙인의 관점으로 진단도 해 볼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속에 통용되는 신몬이라도 만들어서 우리 스스로를 보도하고 또 외부의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를 보도하기도 하는 그런 장이 되게 해야 한다. 또 신문과 회보의 역할이 공존하는 저널도 발행횟수가 적을 떄는 신문보다 유익하다.
(5) 회지
연구자료집이다. 우리 운동의 정체성을 보존함과 동시에 발전시켜가는 장이 회지이다. 회보에서 기획시리즈 등으로 다루는 내용들만을 묶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것 처럼 무엇이든 알맹이만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회보나 신문이나 회지가 알맹이는 다르지만 둘러 싼 형식은 비슷하다. 회지는 연구논문만 싣는다든지 신문은 사실보도만 했다든지 할 수는 없다. 동일하게 우리의 정신을 이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는 것이다.
연구자료집으로서 회지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모임은(혹은 단체는)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회지를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단행본
포스터나 주보, 회보, 신문, 회지 등은 그 다음호가 나오면 잠정적으로 그 호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단행본은 그런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필요가 있는 내용은 단행본으로 부지런히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실제로 예전에 선배들이 다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들도 후배들은 모른채 또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오고 오는 세대에 쌓아둔 정체성을 잘 전수하고 또 아울러 그 위에서 더 발전하기 위해서 단행본을 만드는 일까지 반드시 해야한다.
5. 문서운동의 필요성
문서운동이라 함은 이 모든 것을 함께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학생운동도 복음전도, 말씀연구, 기독교학문연구, 대학문화변혁운동 등 ··· 모두를 다 함꼐 두고 하는 말이지만 그 관심과 은사를 따라 집중적으로 하나씩 감당하는 작은 모임이, 또 각각 하나의 조직을 이루는 것처럼 문서운동도 특정 독자에게 특정한 목적을 갖고 한 종류만으로 사역을 하는 단체(십대들의 쪽지, 복음과 상황, 교회복음신문···)들도 있다. 그러나 복음의 총체성을 지향하고 개혁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일진대 포괄적인 문서운동을 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종류별로 전문화가 시급하다. 내용의 종복을 가급적 피하고 종류별로 특성화시켜야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중앙의 조정도 필요하다. 지금 현재 발행되는 각 학원의 회보, 지역사무실 회보, 자료집 등을 전국지역에 소개하기도 하고 또 지역의 필요에 따라 문헌정보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할 것이다.
그리고 문서운동의 효과를 더해 줄 수 있기 위해서 시급한 전문화와 함꼐 PC통신세대를 참여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PC통신문학에는 비평가도 없다는 요즘시대에 그 세대를 이해하고 방법을 찾아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순간적 영상이 감당할 수 없는 skin contact이 문서는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PC통신으로 문서를 대신할 수는 완전히 없다. 아니 어쩌면 문서운동의 한 분야로 PC통신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효과적 문서운동을 위해 편집 디자인을 뺄 수 없다. 문서의 홍수시대에 사는 지금은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도우는 것도 큰 관건이 된다. 목차에서 내용별로 분류를 명확히 하고 분류제목을 잘 정하는 것도 필요하고, 내용을 실어놓으면서 작은 컷 하나도 그 글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고 핵심부분을 slang(중요부분을 한 번 눈에 띄게 쓰는 것)처리한다든지 해서 내용을 추측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한 무엇보다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편집디자인이 중요하다.
6. 마지막으로
매일 40리 길을 걸으며 시골 구석구석까지 성경을 반포한 한국기독교 초기의 권서들의 열심,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성서를 조선에’라는 머리글을 앞세워 삶을 바친 김교신 선생님의 열정 뿐아니라 그 당시 회중잡지의 50%를 석권했던 신앙의 선배들.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까지 쏟아졌을 선배들의 그 열의를 생각하며 우리도 물려받은 말씀을 지키며 그 신앙을 전수하는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