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2009년에 진행된 "고신 역사와 정신" 수업 중 나눠진 강의안 입니다.
고신교회와 SFC
- 고신교회와 SFC의 관련성 및 독특성-
송재홍 목사 (SFC 대표간사)
머리글
세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경건 운동과 선교운동, 그리고 세계관 운동에 있어서 기독학생운동이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던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위협 앞에 놓이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럽에서는 존웨슬리나 죠지 휫필드 등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인물은 사회의 고조적 악과 맞서 싸워 사회를 변혁시키는 등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역사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는 세계선교운동으로 이어졌다. 19세기의 세계선교운동은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기독학생들의 자원과 헌신으로 인해 그 꽃을 활짝 피우기 시작하여 아프리카와 인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으로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된다. 기독학생운동이 교회 역사 가운데 끼친 영향은 이렇듯 선교운동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기독학생운동은 정통복음주의 신학을 대학 안에서 발견하고 계승하여 경건운동으로 이어갔으며, 세계선교운동의 기초를 놓았고, 세속적 가치관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성경교육을 통해 기독교세계관운동이 확장되도록 하였으며, 복음을 통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의 기독학생운동은 구한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독학생운동은 구한말 유교 중심의 경직된 체제에 대한 개혁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일제시대에는 해방이라고 하는 민족적 과제 앞에서 실질적인 활동을 감당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다. 1960년대 4.19혁명을 계기로 기독학생들은 반정부 세력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그 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지속적으로 체제 도전 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캠퍼스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전도하는 성교운동이 1970년대 이후로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고, 현재는 거의 대부분의 캠퍼스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많은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기독학생운동은 교회 안팎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는 총체적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한국교회의 경건운동과 선교운동, 세계관 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SFC는 이런 기독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고신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왔다.
이 글은 SFC와 관련된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으로서 SFC가 과연 고신교단과 역사적, 신학적, 조직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임을 표방하는 SFC가 갖는 독특성은 무엇인가?
몸글
1. SFC의 역사 (고신교단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1971년에 발행된 "학생신앙운동 20년사" 에서는 SFC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 고신교단의 태동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SFC의 역사적 정체성을 고신교단을 이루게 되는 지도자들의 신학 역사적 행적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함과 함께 거의 동일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1 자발적 기도모임 :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영향
1.1.1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들의 영향
1938년 9월에 열렸던 제27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결의문을 낭동함으로써 우상숭배를 금하신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범죄하고,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결정이 성경과 신앙 약심에 위반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개인적으로 반대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이것에 대해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연히 이것에 반대하던 자들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사선을 넘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도 나오게 되었다. 해방 이후 투옥되었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강압에 패배한 교회를 재건하고, 신사참배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운동과 신학운동을 양축으로 하는 교회재건 운동은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무리들에 의해 왜곡되고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처럼 해방 이후의 양분과 혼란과 갈등 속에서 교회의 회개운동에 동참하던 일단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부산의 제일영도교회(당시 한명동 목사 시무)에 모여서 기도의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의 학생신앙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1.1.2 해방직후 타오른 두 흐름의 모닥불 모임(기도회)과 고려신학교
해방직후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회개운동, 진리운동,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조국교회 재건운동과 고려신학교 설립을 통한 개혁주의 확립, 그리고 학생신앙운동이었다. 해방 후 조국교회 재건을 위한 회개운동에 동참했던 일단의 중고등학생들은 당시의 참혹한 시대와 혼란스런 교회의 상황 속에서 기독학생들로서 자기들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자' 고 마음을 뭉치고 매주 토요일마다 부산 제일영도교회의 한명동 목사의 사택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이들의 기도는 자신과 학원과 교회 모두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모임은 1947년에 와서 '학생신앙협조회' 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학생신앙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그 옷을 갈아입게 되는데, 이는 뒷날 전국학생신앙운동의 모체가 된다.
이 무렵 학생들로 하여금 기도운동을 좀 더 지속적으로 펼쳐갈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었던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한부선 선교사가 이끄는 '청년신앙운동(YFC)' 이었다. 이 모임은 1946년 초부터 부산 YMCA 회관에서 매주 월요일에 모임을 가졌으며, 모임 속에는 학생신앙협조회 출신이 맣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두 모임은 하나로 합류되어 기독학생으로서의 사명과 복음증거에 대한 책임의식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청년신앙운동을 통하여 그 열정을 연장 유지할 수 있었던 학생신앙협조회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또 다른 도구를 통해 영적으로 더욱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1946년 9월에 개교하게된 고려신학교(고신대학과 고려신학대학원의 전신)였다. 고려신학교는 진리운동을 계승하고, 신학교에 훌륭한 신앙 인재를 입학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운동의 힘을 집결하는 목표를 가지고 두 모임, 즉 학생신앙운동과 청년신앙운동을 엮어가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당시 SFC는 조직 면에서는 고려신학교 상사로 봉사하던 한명동 목사가 주도하였고, 신학적인 훈련에는 박윤선 목사가, 전도에는한부선 선교사가, 협동총무로는 전영창 선생이 봉사하였다.
1.1.3 역사의식의 발로로서의 SFC 출발
해방 후 이루어진 대부분의 재건운동은 미족적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이로인한 극한 이념적 대립이 이루어지면서 국민적 정서는 좌우로 분열되고 만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은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고, 정치집단화 된 학원은 좌익과 우익에 속한 학생들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6.25전쟁이라고 하는 동족 사이의 비극이 초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과거 친일이나 신사참배의 과오에 대한 회개는 묻어 둔 채 서로 싸우고 쫓아내는 분열상을 보여준다. 1951년 '고려파' 가 신사참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기존 장로교 총회로부터 쫓겨나 별도의 총회를 구성하게 되고, 1953년에는 기장파가 쫓겨나 따로 총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분열상은 구한말 당시 기독교 세력이 보여주었던 사회변혁세력으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탁류에 기독학생운동도 합류하고 마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던 셈이다.
이런 와중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운동을 벌임과 동시에 민족적 혼란과 분열을 앞에 두고 기도운동을 벌이면서 시대적 모순을 짊어지려는 계층은 그래도 기독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YMCA나 KSCF 계통의 학생들이 아닌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하거나 해방과 함께 출옥한 성도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의 순교의 정신과 피를 계승하려 했던 '학생신앙운동(SFC)' 에 속한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고려파의 영향과 지도를 받아들이면서 개혁주의학생운동으로 성장해 나간다 역사학자 김양선은 "고려신학측 교회의 '학생신앙운동'의 진전도 놀랄만 하다." 고 하였다. 이렇듯 SFC의 출발은 참혹한 시대 상황의 간절한 요청을 통찰한 역사의식에서 이루어졌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 개최 선언문은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
이 폐허로 화한 땅 덩어리 속에서도 새 생명은 움직인다.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보고 비관하고 물러설 자는 물러서라. 그러나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 앞에서 살리신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이제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리리니 신앙 동지여! 굳게 일어서라! 하늘로 귀를 기우리라! 참된 주의 음성을 피로 짓밟힌 이 제단과 피로 물들인 조국의 가슴 속에 전할 자 누구냐?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실로 내 자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과거 6년간 아무 소리 없이 이 생명 위한 운동을 주의 위대한 은혜로 이루어 왔다. 모든 기독학생운동이 큰 환란과 싸움 속에 휩쓸려 허수아비 같이 사라졌을 때라도 우리는 주의 권능과 믿음과 열로 이 시련의 역사를 승리로 굴복시켰다.
동지여! 이제 우리는 전국대회의 필요를 필연적으로 확신한다.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란 이 이름이 필요가 아니라 이 속에 권능과 능력과 섭리로 역사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의인 열 사람! 이는 소돔 고모라가 필요로 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이 슬픈 조국의 제단에는 한 사람의 제물도 찾아 볼 수 없느니 아 - 실로 한심한 조국의 제단이 아니었던가!
동지여 우리는 철석같이 믿음과 힘과 열로 단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 전국대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파숫군, 그리스도의 전달자, 죄와 세속주의와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아- 실로 이 비참한 암흑천지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
동지여! 굳세게 믿음으로 일어서라!
1952년 7월 27일
1.2 요청된 지도체제와 그 의미
1.2.1 지도위원 추대 요청 결정
SFC는 고려신학교를 주축으로 형성된 고려교단(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운동 조직을 정비해 나간다. SFC 1953년 8월 부산 부민교회에서 열렸던 제3회 전국SFC 정기대회에서 지도위원을 당시 고신총회에서 위촉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청원서를 내었다.
1.2.2 특별부서로서의 '학생지도위원' 결정
고신총회는 1955년 4월에 열린 제4회 총회에서 '학생지도위원'이라고 하는 특별 부서를 두도록 결정하고 그 위원들을 선정하였다. 이에 대해 "학생신앙운동 20년사" 에서는
① 본 총회가 학생신앙운동을 공인하는 법적 기관이 됨
② 종래에 상비부(예컨대 학무부, 면려부, 종교 교육부)의 지도 소관에서 별도로 지도함
③ 본 교단 학생운동의 단일화를 의미함
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때부터 SFC는 고신교단과의 공식적인 조직적 관련성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2.3 SFC 주일과 전임사역자의 파송
고신교단과의 관계 속에서 지도위원의 위촉을 청원하고 세운 것 외에도 1960년대 들어서면서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정기대회에서 결의하고 총회에 청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학생신앙운동을 위한 특별기간을 정해 달라는 청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담 사역자를 세우고 그 생활비를 총회에서 부담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별기간에 대한 청원은 1969년에 'SFC 주일' 을 교단 교회가 지키는 것으로 시행되었고, 전임 사역자에 대한 청원은 1971년 김만우 간사가 초대 간사로 세워지면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SFC는 고신교단의 인적 물적 지원 속에서 교회 안의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공고히 해나갔다.
1.2.4 고신교단과 연계된 SFC 조직
앞서 살펴본 바처럼 SFC는 교회 내부의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조직상 처음부터 교회 안의 운동으로 출발한 것은아니었지만, SFC는 초창기부터 고신교단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개체조직을 교회와 학원 조직으로 나누고 있었다. 1954년 1월 9일부터 14일까지 부산남교회에서 모였던 제4회 전국학생신앙운동 임시대회에서 전국적 조직의 윤곽이 설정되었는데, 다음 도표와 같다. (지방 SFC - 노회별 / 지구 SFC - 시찰별 / 교회 SFC - 개체 / 학원 SFC - 개체)
이 도표는 SFC가 기독학생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을 둔 활동을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캠퍼스에서까지 펼치며 선교(전도)운동을 전개했음을 보여준다.
1.2.3 지도체제의 요청과 수용의 의미
위의 내용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SFc는 처음부터 고신교단의 학생회는 아니었다. 다만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의 지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자발적 학생 모임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국정기대회에서 SFC가 먼저 공식적으로 고신총회에 지도체제를 요청했고, 이후 고신총회에서는 그것을 승인하고 학생지도위원이라는 특별 부서를 두었다는 점, 그리고 SFC는 그 지도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이 모든 과정은 SFC의 자발적인 '주체적 수용' 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세어 SFC는 고신총회의 지도를 받는 관계 속에 있지만, 한 편으로는 학생자발운동으로서의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고신교단과 SFC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정신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관계 맺기가 이루여져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2. 고신교단과 SFC의 연관성
SFC의 초기 역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SFC는 고신교단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 둘은 긴밀한 연관성 속에 놓여있다. 이미 앞에서 고신교단과 SFC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었기에 여기에서는 조직적, 신학적 연관성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2.1 조직적 연관성
현재 고신총회와 SFC는 조직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단의 시찰 단위에는 지구 SFC, 노회 단위에는 지방 SFC, 총회 단위에는 전국 SFC가 조직되어 있다. 총회와 각 노회 산하에는 SFC 지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서 각 단위의 SFC를 지도하면서 인적,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개체 교회의 중고등부와 대학부는 1959년의 제9회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에 따라 'SFC' 라는 명칭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다.
2.2 신학적(정체성) 연관성)
개혁주의에 터한 '바른 신학, 바른 신앙, 생활의 순결' 이라고 하는 고신교단의 정신은 SFC의 강령을 통해 잘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SFC의 초창기 역사와 지도위원 요청과 이에 따른 총회의 결정 과정이 보여주는 바는 SFC가 고신교단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가시적으로는 인적 지원 및 조직적 지도로 나타나지만 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 연관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SFC가 기독학생운동으로서 갖는 독특성
3.1 신학적 차원
3.1.1 개혁주의 정체성을 가진 기독학생운동
SFC는 초기부터 '개혁주의'라고 하는 분명한 신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 이유는 박윤선, 한명동, 한부선, 한상동 등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지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강령' 이다. 'SFC 강령' 은 다음과 같다.
SFC 강령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아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 중심 - 성경 중심 - 교회중심
"학생신앙운동 ABC" 에서 강령의 목적을 해석하는 부분을 보면 "SFC는 개혁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다." 고 하는 소제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개혁주의는 SFC의 근거이다. 학원과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과 사고는이 기초위에 있어야 한다. 개혁신앙은 성경의 권위를 새롭게 강조하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강령을 통해 드러난 목적은 SFC의 사명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보다 구체화 되고 있는데,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되어 있다. 첫째는 개혁주의 운동으로서의 복음전도 사명이고, 둘째는 개혁주의 운동으로서의 문화적 사명이며, 셋째는 교회걸설의 사명이다. 특별히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연결 지을 수 있는 '개혁주의 운동으로서의 문화적 사명' 에서는 "우리 운동원들은 자신의 전공에서나 자신의 장래의 섬길 영역에서 이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준비와 훈련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증명할 수 있도록 구조와 정책과 대안을 찾아내어야 한다." 고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SFC가 지향하는 신학적 정체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1.2 복음주의 기독학생운동과의 차이
사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복음주의라고 했을 때에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진 신학적 입장이나 그룹을 의미한다면 개혁주의는 여기에 더해 문화변혁에 대한 열정을 가진 신학적 입장이나 그룹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학생운동단체들은 캠퍼스에서의 성경공부와 복음전도에 집중한다.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인 SFC의 경우는 성경공부와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신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영역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캠퍼스 문화변혁이라고 하는 활동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학생운동에서도 문화변혁이나 사회책임에 대해 표방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캠퍼스에서의 활동은 대체로 극소수의 단체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복음주의 기독학생운동이라고 할 때, SFC도 포함시킨 개념으로 사용되고 잇다. 그래서 복음주의 학원복음화 협의회 공식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SFC가 문화변혁에 대한 열정을 가진 신학적 입장과 동시에 복음전도와 양육, 선교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3.1.3 에큐메니칼 기독학생운동과의 차이
'하나님 나라' 를 성경의 중심적인 주제로 인식한다는 차원에서는 개혁주의나 에큐메니칼 진영 모두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향성을 논리화하고 구체화하는 신학적 체계에 있어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이 정통 보수적인 신학을 배경으로 한다면 에큐메니칼 기독학생운동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으로서의 SFC가 "교회-정위적" 흐름에 있다면 에큐메니칼 기독학생운동은 "사회-정위적"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2 조직 및 사역적인 차원
3.2.1 교단과의 관계성
대부분의 캠퍼스 선교단체들은 교회나 교단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특정한 신학적 입장에서 목적과 방향을 정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있고, 신학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캠퍼스 복음화를 하나의 특수사역으로 인식하고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SFC는 개혁주의라고 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서 캠퍼스 복음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대부분의 단체들의 경우는 특정 지도자의 신학노선을 따르고 잇다. 반면 SFC는 개혁주의 신학의 터에서 형성된 고신교단의 지도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적, 재정적 자원도 고신교단으로부터 직접 지원 받고 있으며, 조직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신학적으로나 여러 활동에 있어서 지도를 받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특정 인물 중심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SFC는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 중심의 성향을 갖고 있다.
3.2.2 사역대상의 범위
한국의 캠퍼스 선교단체는 거의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도 많이 생겨나기는 하였지만 대학에 비하면 아직 미약해 보인다. SFC의 경우는 현재 100여 개 이상의 대학 캠퍼스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녀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SFC가 갖는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방 SFC' 를 통해 고신교단 안의 중고등부를 돕는 교회연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동안 소홀했던 교회의 청년대학부까지 지원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 중에 있다. 정리하면, SFC는 청소년과 대학생, 교회와 캠퍼스를 파편적으로 인식하기 보다 하나의 묶음으로 긴밀하게 아우르고자 하는 사역 패러다임을 가진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4. SFC의 비전과 방향, 사역
4.1 비전
SFC의 비전은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작성된 'SFC 강령'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1953년 8월에 정식으로 채택된 강령은 운동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사명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강령은 크게 4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조와 목적과 사명과 생활원리가 그것이다.
SFC가 받아들이는 신조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다. 신조를 강령의 1항으로 시작하는 것은 SFC 운동이 개혁주의 신앙고백 공동체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목적 부분에서는 개혁주의 사상을 기초로 함과 세상을 변화시킬 성경적 지도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주권을 증명하는 것이 SFC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명 부분에서는 개혁주의 운동으로서의 복음전도와 문화변혁, 교회건설에 SFc의 사명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활원리 부분에서는 개혁주의 원리의 최대 표현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인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신 성경을 유일한 법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다는 성경 중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또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교회 중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4.2 방향과 원리
SFC의 비전인 강령 성취를 위한 사역 방향과 원리에는 복음전도운동, 성경적 리더십 양성운동, 성경적 대안실천운동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복음전도 운동은 복음을 통한 재생산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복음전도를 통해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거룩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하며, 열방을 향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세워가는 것이다.
성경적 리더십 양성운동은 복음전도와 성경적 대안실천운동을 분병한 비전과 사명의식을 갖고 구체적으로 전개할 리더들을 배출해내는 운동을 의미한다. 성경적인 리더십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가치에 헌신되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하나님 나라 운동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경적 리더십 양성운동은 사람을 세워가는 운동이다.
성경적 대안실천운동은 가정, 교회, 캠퍼스, 사회, 국가, 민족, 세계 등 우리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는 삶의 구조들을 변혁시키는 운동이다. 변혁의 사명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요구이며 요청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대안실천운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 기초한 영역운동의 기조이다.
4.3 사역과 운동
SFC 사역은 강령에서 말하는 바 조국과 세계의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할 성경적 지도자를 배출해 내는데 그 목적이 잇다. 이는 이 땅의 대학생들과 청소년들을 복음전도의 사명을 가진 자로서 모든 캠퍼스와 세계에 나아가게 함은 물론 균현 잡힌 영성과 성경적 세계관으로 훈련시켜 그들이 처한 모든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어 세상을 의롭게 이끌어가도록 세워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현장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연합사역, 대학사역, 청소년사역, 해외선교사역과 이를 지원하는 훈련원사역, 학생연구소사역, 출판사역, 미디어사역 등을 실시하고 있다.
SFC 운동은 사역과 양육뿐만 아니라 변혁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이다. SFC는 변혁적 공동체로서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과 시대적 문제들을 끌어안고 가고가 하는 운동을 열정을 가지고 전개하고 있다. 캠퍼스문화변혁운동으로서 대학문화5적 추방운동, 컨닝추방운동, 명예제도 도입운동, 좋은학교 만들기운동, 좋은언어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운동으로서는 다움운동, 말씀과 기도운동, 전도운동, 이단추방운동, 교회사랑운동 등이 있다. 통일운동으로서는 통일연구운동, 통일선교모임, 통일비전트립 등을 실시하면서 영적각성을 통한 민족사랑운동, 북한선교기초세우기운동, 민족나눔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 학사운동으로서는 동문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활발하게 전개될 필요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슈운동으로서 마약추방운동, 낙태반대운동, 공명선거운동, 바른지도자세우기운동, 대학생부재자투표참여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4.4 사역의 활성화를 위한 구도 조절
SFC의 사역과 비전이 폭넓은 반면 지금까지 조직은 그 사역과 비전에 못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SFC에서는 2008년부터 사역의 분화와 전문화를 추구해 오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사역부별 총무 체제가 세워졌다. 본부 총무, 곡제사역총무, 대학생사역부 총무, 틴 총무, 영영동문총무, 교회사역총무, 훈련원 등이다. 특히 대학생 사역은 간자 간사 수가 많고 활성화 된 사역으로 리더십 아카데미(SLA)와 전도와 대안실천운동을 하는 미션을 감당하는 SMC(Small Group Mission Community), 그리고 여러 특성화된 모임과 양육을 통해서 활성화 되어 가 전망이다. 틴 사역은 부산과 경남권을 중심으로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바 앞으로 '틴 사역의 전국화'가 과제이다. 교회사역 관련해서는 1959년 9회총회 때 가결된 교회 중고대학부에 SFC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의된 내용과 관련 Vision Partnership을 다시금 재정립하고자 교회를 위한 여러 사역들을 계획하고 있다. 국제 대학생 사역과 관련 올해 2명의 간사를 해외로 파송하고 미주 SFC를 비롯하여 해외 여러 SFC 미조직 국가의 선교사님들과 SFC가 협력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좀 더 앞당길 것이다. 올해 제2차 국제 대학생대회가 준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훈련원은 건립을 위한 모금을 통하여 훈련원 거립을 통해서 비전을 실천하는데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꼬리글
고신교단이 민족적 비극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과 조국교회의 타락에 대한 회개에서 비록된 역사의식의 발로에서 출발했듯이 SFC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질의식은 자연스럽게 적극적인 지도와 주체적 수용이라고 하는 과정을 이루도록 이끌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50년 이상 이어진 이 관계는 SFC가 갖는 고신교단의 신학과 정신을 가장 잘 담아내는 담지자로서의 역사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에 기초한 고신교단의 신학과 정신이 SFC를 통해 캠퍼스에까지 확장되어 영향을 끼쳐왔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와 교회 전체를 섬기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SFC는 고신교단이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 키워온 개혁주의 기독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고신교단과 SFC 사이의 긴밀했던 관계가 실제적인 사역에서 느슨해지고 있는 부분들이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교회 차원에서 보면, 교단 중심의 흐름에서 개체교회 중심의 흐름으로 바뀌면서 'SFC' 라는 아름으로 불리던 고신교단의 중고등부와 대학부 사이의 동질의식과 연대의식이 사라져가면서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시찰, 노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한 연합활동의 실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SFC 차원에서 보면, 80년대 이후 사역의 중심축이 대학 캠퍼스로 옮겨지고 전임사역자(간사)들이 주로 캠퍼스에서 배출됨으로써 고신교단의 중고등부와 대학부와 연계된 사역이 위축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과 문제들을 서로 인식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SFC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 구체적인 사역과 관련하여 사역 패러다임과 구조를 개편하고 있는 중이다.
SFC와 고신교단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SFC가 성장하고 사역이 활발해지는 것은 결국 일차적으로 고신교단과 교회의 중고등부와 대학부에 유익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보다 발전적인 차원에서 교회와 SFC 모두가 적극적으로 협력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자라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이 SFC에 관심과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고신교단의 미래는 밝을 수 밖에 없다. 이를 위해 SFC는 더욱 열정을 가지고 섬겨 나갈 것이다.
질문들
1.교단 여러 교회 중고등부, 대학부에서 교단과 함께 해 왔던 SFC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SFC가 기독학생 선교단체와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차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3. SFC가 교단 내지 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활동하기를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