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89년 "제7회 대학SFC 대표자모임 자료집 - 학생신앙운동 정체성과 방향성 정립을 위한-"에 실린 주제발표문입니다.
이명규 (경남대, 경남U-SFC 위원장)
목 차
들어가면서
I.SFC의 성립배경 및 과정
1.신사참배
2.고려파 운동과 SFC의 성립
3.SFC의 태동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함이다.
4.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II.SFC의 대외관계
1.고신교단과의 관계
2.청년신앙운동(YFC)와의 관계
3.총신과 SCE(학생면려회)와의 관계
4.선교단체와의 관계
5.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III.교육
1.초창기의 교회 교육과 학원 SFC교육의 상관관계
2.80년대 이후의 교회교육과 학원 SFC 교육의 상관관계
3.학원 SFC 교육의 역할과 현 위치
4.수양회와 대학생대회
5.지도자 수련회와 학원 대표자 모임
IV.복음화
1.복음전도
2.그리스도인의 삶
3.사회참여
V.지도자
1.학생신앙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인식
2.지도체제의 변화
3.간사제도의 도입
4.선배
5.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들어가면서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은 그 시대 시대에 따라 살아 역사하시며 그 시대의 여러 종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분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그 분께서 일제의 압박에서 하나님의 제단이 찢겨지고 하나님의 자손들이라 부르짖던 자들이 하나님 앞에 등을 돌리며 자신을 합리화 할 때, 믿음의 그루터기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물질의 압박, 도덕적 타락의 요구, 이데올로기의 압박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 때에 이러한 압박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종이라 부르짖던 자들이 모두 다 우리의 곁을 떠난다 해도 우리 SFC 맨은 하나니 ㅁ앞에 등을 돌릴 수 없으며 그것을 합리화할 수 없고, 오직 그 분만으 위해 일하다 그분 만을 위하다가 죽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SFC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과거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막았던 잘못을 알아보아 뉘우쳐 SFC가 보다 더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다. 다음과 같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SFC의 성립 배경과 과정, SFC의 대외(對外) 관계, 교육, 복음화, 지도자 순으로 살펴보고 SFC 강령에 의거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함께 많은 고민을 하기를 원한다.
I. SFC의 성립배경 및 과정
여기서는 SFC 성립의 핵심적 배경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은 『학신 이념과 실제』,『학신 20년사』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1. 신사참배
안재눈 조선 통치 말기에 소위 대륙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 황민화정책 등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정책의 거점을 신사에 두고 "일면 일신사주의(一面 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 요소요소에 신사를 건립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 하여 모든 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당시 조선의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 언론인, 농민, 종교인들 대부분이 굴복한 가운데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회집된 제27차 총회에서 결국은 신사참배가 가하다는 결의를 했고 동년 9월 30일 평양신학교가 무기휴교에 돌입했으며, 1941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일에는 마침내 한국의 개신교 각 교파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이라는 명칭 아래 통합시켜 버렸다.
2. 고려파 운동과 SFC의 성립
신사참배 가결로 말미암아 교직자들은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만드는데 선동하고, 심지어 양 떼를 이끌고 일본의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를 거부한 무리들은 한국교회의 죄와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운동을 일으켰는데, 출옥한 성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온 교회로 파급되었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성립의 계기가 되며, 이것이 SFC가 태동하는 계기가 된다. 우상숭배에 대한 회개운동에 학생들도 동참하게 되었는데, 회개와 눈물로 지새우는 목사, 장로, 아버지, 어머니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신비로운 영감에 사로 잡혔으며 학생들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들도 한국교회의 공죄와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기도를 하며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기 원했고,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했다. 세 가지 방향의 제목으로 기도했는데, 학업충실·복음전도·교회봉사를 위해서 였다. 이러한 기도모임이 학생신앙협조회, 학생신앙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 학생신앙협조회 (1947년)
이것은 경남지역학신 발간 SFC 편지 3호에 실린 한명동 목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싣기로 한다. "나도 그때 한국교회의 장래희망은 학생들 특별히 젊은 대학생들에게 걸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 학생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지도해야겠다는 결심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학신의 가장 기초적인 이념이 될 이들의 기도와 활동의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내일의 조국과 세계와 교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업에 충실하여 실력을 길러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웃 학생들에게 생활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소속의 교회에서는 겸손하게 희생 봉사하고 즉, 교회 각 기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말고 숨어서 희생 봉사하며, 회장이나 부회장 등을 맡지 말고 언제나 회장 밑에서 부장 밑에서 그들을 잘 보좌해서 최장이 직무를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절대로 앞에 나서지 말자라는 태도로 봉사했다. 이것이 학신의 기본정신이다. 그래서 협조라는 자리의 의미에서 '학생신앙협조회' 라고 했다."
2) 학생신앙운동 (1948년)
기도회 모임에서 '학생신앙협조회' 라고 부르다가 1948년 8월 2일 '학생신앙운동' 이라고 그 명칭을 한정했다. 이것은 사실상 이 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이다. 이 운동의 발단의 몇가지 특질은 첫째, 신앙적인 자발심에서 출발된다. 둘째로, 신앙의 자립니다. 셋째로, 순수한 한국적인 기독학생운동이다.
3. SFC의 태동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서 범죄함을 합리화 시키고 있을 때,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섰다.
4.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1) 우리의 자신 속에, 교회에, 학원에 신사는 없는가? 우리는 그런 것에 영적으로 민감한가? 아니면 둔감한가? 합리화시키는 것은 없는가?
2) 우리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어른들이 있는가? 우리들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자들인가?
II. SFC의 대외관계
SFC의 대외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시정할 점은 무엇인가? SFC의 대외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SFC를 중심으로 제반 환경조직을 해석하고 상호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많은 대외관계를 가졌지만, 여기서는 고신교단, 청년신앙운동, 총신과 SCE(학생면려회), 타 선교단체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고신교단과의 관계
1) SFC 태동의 직접적인 역할
SFC 초창기 멤버들은 그들의 목사, 장로, 아버지, 어머니가 신사참배를 하고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또한 신사참배를 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 멤버들은 그들의 어른들의 신앙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친히 목도함으로써 SFC의 방향들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2) 고신교단의 하부조직으로서 SFC
고신교단 하부조직으로서 SFC라고 한 것은 SFC의 운동이 고신교단 안에서만 이루어진 반면 다른 교단의 수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지방과 지구의 생성은 노회와 시찰의 생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말해 지방과 지구는 노회와 시찰의 성장이 있은 후 변화가 있는 것이다. 행정적인 면에서 노회와 시찰과 함께 이루어져 하부조직화 되었고 그의 지시를 받는 것이다. 또한 SFC를 지도하시는 분이 모두 고신교단의 목사님 내지 장로님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3) 인적(운동원), 물적, 기도지원 받음
초창기에 전도의 열심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도의 열심이 없어도 SFC운동원의 확보는 가능했다. 지구 SFC는 개교회 SFC 맨으로 구성되고 지방 SFC는 그렇게 모여진 지구 SFC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체로서의 SFC가 운동을 할 때, 개교회를 통해 상당한 인적 지원을 받았다고 하겠다. 이것은 현재의 학원 SFC를 바라보더라도 상당 수의 운동원들은 고신 교단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물적 지원을 받았다. 수양회나 여타 사업을 할 때, 일반 성도나 교회를 통해서 지원을 받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수양회나 사업을 할 때, 물질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기도 지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4) 개혁신앙 훈련 감당
초창기에는 고신교회 전체가 개혁신앙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 부분에 가서도 언급하겠지만 고신교회의 모든 성도나 목사, 장로님 모두가 회개하며 개혁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했고 따라서 SFC맨들은 자연스럽게 훈련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일이다.
2. 청년신앙운동(YFC)와의 관계
학생신앙협조회의 뜨거움이 있을 즈음에 부산 YMCA 회관에서는 YFC라는 이름하에 미군과 한국의 청년들이 초교파적으로 한부선 선교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월요모임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한명동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미군과 한국 청년들이 연합으로 모인 집회로 초교파적이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부산 시내에서는 연합집회가 이 단체 하나뿐이니까 청년신앙운동을 고려파적으로 주도해 나가자, 그래서 우리 고려파 신앙노선을 침투시키는 좋은 의미의 점령을 해야겠다고 해서 학생신앙협조회 회원들도 전부 이 청년신앙운동 집회에 참석했다. 그것은 그 내부를 고려파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였다. 마침 미군이 철수한다고 해서 1948년 4월에 부산청년신앙운동이 총회로 모였는데, 대거 고려파 학생들이 참석하여 임원이 되었다. 이것은 SFC의 사명이 개혁주의 교회건설에 있음을 주지할 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3. 총신과 SCE(학생면려회)와의 관계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장로회 합동(고신-총신)을 이루게 되는데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한국 보수교단의 일대 전진이었다. 이에 따라 SFC에도 크나 큰 의미를 가지는데 이 때 초신 산하에서는 고신측 총회 산하처럼 교단의 통일적인 학생운동이 없었다. 그래서 총신 측은 고신 측의 SFC 운동을 합동통회에서 그대로 승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61년 3월 22일 대구 서현교회당에서 합동대회가 성공리에 마쳐졌다. 그러나 합동한지 만 3년도 못되어 그 본래대로 되돌아 가야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이것은 SFC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교단의 합동과 분리에 따라 SFC도 합동분리 되어야 하는 아픔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사명이 개혁주의 교회의 건설에 있음을 알 때, SFC는 개혁주의라는 이름 하에 모든 교회, 교단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하나됨(결코 조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총신에서는 교단 분리 후 계속해서 그들의 학생운동을 SFC라 하다가 1974년에는 SCE(학생면려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로써 계속해서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학신가도 강령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4. 선교단체와의 관계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경우는 없지만 그를 위한 시도는 많이 있었다. 1956년 8월 11일 제7회 정기대회에서는 외국의 신아동지와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는 의견을 보았고 1964년 1월 13일에 개최된 제16회 정기대회에서는 국제적인 안목을 위하여 IVF에 가입하기로 가결된 일이 있으나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제5대 간사로 헌신하신 강영순 목사님의 말씀이다. "60년대 말 세계 복음주의 연맹에 가입하여 국제적인 무대로의 발돋음에 일말의 기대도 가지기도 했지만 유산되었고, 두번째로 화란 개혁파 학생운동과 유대관계를 위해 합의까지 하고서 추진과정에서 또 한번 결렬되는 쓰라림을 안았습니다. 이제 SFC를 이해하는 가운데서 세계무대를 저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세계복음화를 겨냥하는 일군을 부지런히 키워야 합니다."
III. 교육
SFC에서 교육이라 하면 강령을 이해하고 강령대로 살고자 하는 개혁신앙인을 배출하는 것이라 하겠다. SFC 맨이라 하더라도 강령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개혁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진정한 SFC 맨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SFC 맨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SFC에서의 교육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초창기의 교회교육과 학원 SFC 교육, 그리고 19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교회교육과 학원 SFC 교육, 또한 중고수양회와 대학생대회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은 SFC 교육의 대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1980년대로 구분하는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1. 초창기의 교회 교육과 학원 SFC교육의 상관관계
초창기의 교회교육과 학원현장의 교육은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에서 교육받은 자들이 학원 속에서 실천적인 교육을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개혁신앙인으로 훈련 받아 학원에서 전도봉사 등 실천적 섬김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의 기본전제를 지금도 그대로 적용하려 하지만 그렇기 되지 못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교회교육이 개혁신앙인의 배출을 충분히 감당했다고 본다. 초창기에는 교회 어른들이 실제적으로 개혁신앙인의 생활을 보여주었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사참배의 거부에 따른 신앙의 절개를 후세대에게 물러주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명동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장래희망을 학생들에게 걸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한 것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훈련 받은 자들이 자연스럽게 학원 속에서도 개혁신앙인의 삶을 살아갔다고 할 수 있다.
2. 1980년대 이후의 교회교육과 학원 SFC 교육의 상관관계
교회 교육을 통해 학원 속에서 사명을 다하는 초창기 교육의 기본전제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말해 교회가 개혁신앙인의 배출에 자기 몫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신 교단의 특색 강조시, 초창기의 고신 교단의 신앙생활을 요구할 시 어느정도 개혁신앙인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신 교단의 특색을 강조하지 않고 있으며 강조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 당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들 했지만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다. 이것은 SFC가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지금은 개교회주의로 말미암아 지구, 지방 SFC가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며, 비록 되고 있다 하더라도 개교회의 소극성은 주지의 사실이며 더욱 더한 것은 SFC의 이름조차도 없는 고신 교단 교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 교회 운동원들에의해 이루어진 학원 SFC의 활동도 위축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원 SFC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학원 SFC가 자체의 교육을 통해 개혁신앙인을 배출해서 활동케 해야 하는데 교회에서 훈련된 개혁신앙인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체에서 교육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학원 SFC 교육의 역할과 현 위치
1970년대, 1980년대에 걸쳐 학원복음화에 대한 열정은 있었으나 그를 뒷받침하는 개혁신앙인의 배출을 위한 교육은 상당히 미흡했다. 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학원 SFC가 감당해야 했는데 이 때의 학원 SFC의 교육도 체계없이 주먹구구식이었다. 위원들의 그때그때의 결정으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을 거쳐오면서 교육에 있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SFC 속에서 개혁신앙인 양성을 위한 몸부림이 간사님을 중심으로 있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SFC 속에서 나름대로 4년간 커리큘럼이 날마다 주님과 31호(1986년 12월호)에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은 계속해서 수정보완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4. 수양회와 대학생대회
SFC에서 최초의 수양회는 1948년 8월 2-7일까지 고려신학교에서 있었다. 이러한 것이 주로 부산에서 이루어지다가 1952년 7월 21-28일 사이에 학신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양회를 해오다가 1974년에는 대학생대회가 개최된다. 대학생대회만도 올해로 16회 째를 맞이했다. "학신 20년사"는 수양회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첫째로 중생 체험의 적기인 중고대학생들에게 강력한 영적체엄의 기회가 되므로 새사람 운동에 힘이 되었다. 둘째로 집단적인 신앙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새사명의식에서 분발케 했다. 셋째로 연합적인 모임을 통하여 뜨거운 성도의 교제를 체득케 한다. 넷째로 흩어진 학도들로 하여금 종합적인 수련을 통하여 우리의 갈길(교단의 이념)과 영적 긍지를 함양 시킴에 기여하였다. 다섯째로 받은 은혜 체험을 통하여 어릴 때부터 교회봉사와 국가 봉사에 앞장서는 지혜를 체득케 했다. 여섯째로 각 지방과 각 학교에 전도운동의 붐을 조성하므로 사람 낚는 어부의 재미를 보게 했다. 일곱째로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단의 발전에 소망의 비전을 일으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수양회는 확실히 많은 운동원들을 헌신케 하고 헌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했다. 지금 우리들의 추억 속에 수양회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수양회의 책임은 수양회가 이루어 지는 그 장소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헌신하게끔 했지, 그 후속조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양회가 끝난 후 어떻게 살아가든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양회와 일상 생활과의 연관성이 지속적이지 못했다. 한 그리스도인이 온전히 헌신하려면 그 헌신의 결단과 아울러 준비가 필요한데, 수양회는 헌신의 결단은 시켰으나 준비는 못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교육과 지구·지방과의 연계성 결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대학생대회도 언급했지만 수양회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생대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는데, 학원 SFC 교육과정과 연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대회를 통해 헌신한 자를 학원 SFC의 교육과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준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5. 지도자 수련회와 학원 대표자 모임
지도자 수련회와 학원 대표자 모임 둘 다 교육에 관련된 것이지만 수양회와 대학생대회는 복음화와 관련된 복합적인 것으로 복음화 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
IV. 복음화
복음화라는 것은 한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하게 하는 복음전도와 구원 받은 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게 하는 것이며, 그와 아울러 사회에 나타난 제반사항을 주님께 굴복시키려는 사회참여를 통틀어 말한다.
1. 복음전도
1) 초창기
회개의 기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작은 모임의 기도의 방향들이 학업충실·복음전도·교회봉사인 것을 볼 때,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부터 시작된 수양회에서도 주로 강조된 것이 회개와 기도 그리고 전도의 불길이었다.
① 제1차 전도운동(1949년)
"1946년에 YMCA 회관에서 모였던 청년신앙운동의 모임에서 여기에 관계된 미국인 한 병사가 미국에서 한부선 선교사님을 통해 100$이 전달되었다. 이 돈으로 전도지를 인쇄하였다. 그리하여 부산 시내 5만 여호를 대상으로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였다. 이 전도가 끝날 무렵 출옥성도 손양원 목사를 강사로 YMCA 회관에서 부흥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5백 여명의 수확을 얻어 해방을 주신 주께 영광 돌렸다. "
② 제2차 전도운동(1950년)
"1949년에 벌어진 전도운동의 즐거운 소식을 한부선 목사는 미국에 있는 형제에게 기쁨을 전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미국의 그 형제는 111$이라는 큰 액수를 한부선 목사에게 보내왔다. 한부선 목사는 그렇게 많은 돈을 모두 전도운동에 사용하였다. 이 돈으로 요한복음(쪽복음)을 10만 부 인쇄하였다. 1949년 학생들은 이 복음을 들고 부산 시내 축호전도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시내 목사님들을 모시고 3개 처 국민학교를 빌려서 전도 강연회를 개최하여 부산의 시민에게 예수를 심어주었다."
2) 1950 - 1960년대
1954년 4월 6일 제3회 전국 정기위원회서 춘계 교내 복음화대회를 갖기로 결정해 전도지(요한복음)를 인수하여 분배키로 하였다. 수양회를 중심으로 전도를 해오다 1960년대에는 고교학원 SFC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부산에서 6개 학원 SFC가 조직되었고 동년 7월 22일에는 연합 발기총회까지 가지게 되었다.
3) 1970 - 1980년대
1970년대를 들어오면서 간사 제도의 도입과 아울러 학원 복음화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되었다. 김만우 목사님의 서울지역 사역으로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대학 SFC의 활동이 일어났는데, 그에 의한 뜨거움이 1974년 대학생대회 개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타선교단체의 간접적인 자극에 의해서도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김준곤 목사에 의해 소개된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복음주의적 초교파적 기독학생운동을 시작했었다. 이어 1960년 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기독학생회, 네비게이토 등의 외원(外原) 선교단체와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를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는데, 1974년에는 한국교회의 전도의 불길이 일으킨 CCC 주최 "엑스폴로 74"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SFC는 자성론이 대두되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에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이념의 정지작업을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결과로 1971년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부산 동래수양관에서 제1회 SFC 지도자 수련회로 모였다. "우리의 사명과 내일의 좌표" 라는 주제로 모였는데, 강령해설, 복음화 전략, 학원 프로그램, 타 기독학생단체 연구 등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다. 그 후 지도자 수련회는 1972년 경주, 1973년 대구, 1974년 부산에서 계속 되었는데, 여러 대회 및 수련회 등으로 또 하나의 수렴회를 가지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므로 보류하다가 지방별로 분리 실시되었다. 이것 모두 복음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를 거쳐오면서 대학 SFC의 조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대학연합 SFC의 발족도 보게 되었다. 1980년 대의 특이할 만한 것은 SFC 정체성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학원 대표자 모임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
3. 사회참여
1) 국기배례 문제 (1949년)
진해지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학교에서 강요했는데 이에 대해 학생들이 거부했다. 그러자 학교 측에서는 100여명을 정학시켜 버렸다. 3-4개월동안 학교를 못가게 되었는데, 학기 말이 되어 처리를 할려니까 별도리가 없어 정학처분을 받은 학생들에게 별도의 시험을 치게해서 진급할 수 있게 했지만 몇 명은 유급을 당하였다. 그러자 이 문제가 급기야 노회에 까지 진전이 되어 노회에서 이승만 박사에게 까지 진정이 되었다. 그 때의 진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주목으로 변경되었다.
2) 주일성수 문제 (1950년)
진해에서 일어난 것으로 주일날 등교하는 것을 거부하여 전쟁 중인데도 데모를 하였다. 믿지 않는 학생들도 동조를 해 관철하게 되었다.
3) 진주사범학교 (?)
겨울 내내 얼어붙은 화장실을 더운 물로 깨끗이 청소하여 SFC만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활동 허락을 받았다.
4) 마산여고 학생회 (1955년)
학생회를 SFC가 장안하여 학교의 모든 행사를 SFC가 주도하게 되었다.
5) 최제대 소위 (1969년) 소천
대구대 ROTC 출신으로 부하의 실수에의한 위험을 자신이 감당하므로 많은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6) 개혁신앙 연구회, 실천회 (1988년 이후)
V. 지도자
1. 학생신앙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인식
요즈음과 같이 다양하고 전문화된 시대에 계속해서 아마추어리즘에 의해 운동하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시대에 따라서 여러 지도자를 세워서 자신의 일을 해오셨다. 따라서 SFC 내에서도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이 정기대회와 위원회 시에 많인 거론되었다. 다음은 전국정기대회록와 위원회록을 중심으로 지도자 문제가 어떻게 언급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3년 8월 제3회 전국SFC정기대회, 지도위원 추대 문제를 총회에 위촉키로
*1954년 3월 12일부터 모인 제3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시에 당시 SFC 위원장 배경재 씨가 총회장 앞으로 "전국학신 지도위원을 총회에서 위촉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낼 결과 본 교단 총회에서는 상비부가 아닌 "학생지도위원"이란 특별 부서를 두도록 결정.
*1954년 3월 20일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전국 SFC산하 위촉청원건" 으로 모였는데 다음 총노회 소집 때까지 임시 지도원원으로 하여 기존 윈칙 및 기타일체를 연구지도하여 보고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지도위원으로 한명동, 이약신, 한상동, 송상석, 박손현, 윤봉기, 황헐도 등 이었다.
*1958년 7월 31일 제9회 정기대회, "전국학신 전임교역자 모시기로 결정"
*1959년 8월 18일 제10회 정기대회, "전국학신을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의 한 직속기관으로 총회에 청원"
*1961년 1월 10일 제30회 위원회, "총회 산하 학생단체를 합동총회가 인정하는 학생신앙운동으로 단일화 할 것을 청원"
*1966년 1월 15일 제55회 임시위원회, "전담총무에 관한 연구"
*1966년 2월 24일 제56회 정기위원회, "SFC 유급총무 선정 건의"
*1971년 1월 9일 제76회 신임위원회, "전국 SFC 스텝에 관한 것을 이만길, 오충섭, 한기영, 최송명, 석원태, 김경래 등 6명에게 전권을 위임하기로 함."
*1971년 2월 23일 제77회 정기위원회, 학원 SFC 언급에서 사명있는 지도자와 SFC 핵심 맴버 확보를 다룸.
*1974년 12월 26일 제100차 위원회, "전국SFC 2대 간사로 변의남 전도사 추대"
*1975년 6월 5일 제104차 위원회, "전라지방 간사로 정근두 조사 위임"
*1975년 12월 26일 제108차 위원회, "김동식 경남 간사와 강영순 경북 간사의 사임을 수리"
*1977년 4월 4일 제116차 위원회, "전라지방 김재술 강도사와 부산지방 이환봉 전도사의 간사인준 선임"
*1978년 2월 16일 제120차 위원회 "풀타임" 간사제와 직능별 간사제도의 채택을 원칙으로 하고 대표간사에 장희종 목사를 추대하고 직능별 간사는 대표간사와 최종 협의하여 선정키로 함.
*1978년 4월 7일 제121차 정기위원회 시, 위원회 도중 SFC 기도시간이 되어 학원복음화와 지도자 양성문제를 놓고 기도.
*1981년 1월 21일 제138차 정기위원회, "강영순 간사님 퇴임문제 퇴임 결정"
*1986년 1월 27일 제38차 정기대회, "간사 선임을 어떤 방법으로 누가 선임하고 있는지 질문하다. 전적으로 총회 지도위원회서 선임한다고 대답."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도자의 문제는 끊임없이 대두되었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학생이라는 신분 입장에서 분명히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 개개인을 통해 직접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셔서 더 활력있는 자신의 역사를 이루길 원하셨다.
2. 지도체제의 변화
1) 초창기 지도자
학신운동이 선운동 후조직이었으므로 총회 인준에 의한 공식적인 지도자는 없었고 뒤에서 음성적으로 지도해 주셨다. 이 운동의 시발기에는 SFC 자체 내의 추대로 지도위원장에 한상동 목사, 부위원장에 정영창 선생을 세우고 다음에는 박윤선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지도가 되어왔다.
2) 특별부서로서의 학생지도위원
1953년 8월 제3회 전국SFC 정기대회 시에 지도위원 추대 문제는 총회에 위촉하기로 하다. 그리하여 1954년 3월 12일부터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에 당시 SFC 위원장 배경재 씨가 총회장 앞으로 "전국 학생신앙운동의 지도위원을 총회에서 위촉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낸 결과 고신 교단 총회에서는 상비부가 아닌 "학생지도위원" 이란 특별부서를 두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총회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학생지도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이것은 고신총회가 학신을 공인하는 법적 기관이 됨과 고신교단의 학생운동이 단일화를 의미하는 의의를 띄고 있다.
3) 학생지원부
학생지원부는 다음과 같은 연유로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 속에서 학신의 위치 문제가 거론되게 되었다. 또한 교회 SFC와 학원 SFC의 관계가 어떠한가? 그리고 각 노회별로 시찰별로 학신에 관한 지도자들의 이견들이 약간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전국 SFC 제10회 정기대회(1959.8.19-20)는 "전국 학생신앙운동을 총회 상비부서로 설정하여 주도록 청원키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제9회 총회(1959.9)에서 한부선 목사의 명의로 총회에 상정되어 정치부로 넘어가서 결정된 내용은 "학생지도위원제는 종전대로 하되 각 노회에서 학생지도부를 두도록 결정" 하였다. 여기서는 학생운동에 대한 명칭을 학생신앙운동으로 통일하는 것과 학생신앙운동이 각 치리기관에 복종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4) 총회 상비부로서의 SFC
1966년 9월 22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회집된 제16회 총회에서 종래의 학무부, 면려부, 종교교육부에 속한 업무를 모두 "교회교육부"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이 교회교육부 산하에 전국 유년주교 연합회, 전국 SFC, 전국 CE등을 통괄하므로 완전히 SFC는 특별부서에서 상비부서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SFC는 각 치리회의 상설 단체로 확정되므로 총회 산하의 모든 교회는 어떤 경우든지 막론하고 SFC로 단일하게 되었다.
5) SFC 총회 지도위원회
제7대 SFC 대표간사로 이성구 목사님이 헌신하고 계실 때, 이 당시의 간사님들은 총회에 교단적은 후원을 받기 위해 이사회 성격을 가진 기구를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총회에서는 "SFC 총회 지도위원회"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 지도로 간사의 지도 노선에 차질이 생겨 3명의 간사가 집단 사임을 하게 된다. SFC 간사를 이곳에서 전적으로 선임해오다 1990년도부터는 지역 대표간사의 추천이 들어가게 되었다.
3. 간사제도의 도입
1) 간사제도의 필요성
1958년 제9회 전국 SFC 정기대회에서 SFC 간사를 모시자는 건의가 있었다. 그러나 13년 후인 1971년 김만우 목사가 초대 간사로 취임함으로 시작되었다. 간사 제도를 도입한 의미를 "학신 이념과 실제" 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첫째는 SFC 운동의 연속성을 위함이다. SFC 위원의 임기는 1년이므로 장기적인 계획과 추진에는 어려웠다. 둘째로 학생운동의 전문화에 부응하기 위함이다. 학생운동과 학원선교는 임기응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문적인 자질과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전문적인 연구와 계획을 통해 운동을 힘차게 추진시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학생 스스로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간사가 담당하므로 SFC 운동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2) 간사 선임제도
초창기에는 전국위원회에서 추대해오다 지금은 총회 SFC 지도위원회에서 선임하게 되었다. 1990년도 부터는 지역간사 추천에 의한 총회위원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위원회에서 추대할 때에는 SFC를 이해하고 나름대로의 비전을 가진 간사님들을 선임할 수 있었지만 총회 지도위원회에서 간사를 선발할 경우에는 그런 점이 미약했고 또 전국위원회에서 선임할 경우에는 교회와의 원활한 관계와 재정적인 지원이 원만하지 못한 약점도 있었다. 그래서 1990년에 처음으로 간사 선임에 있어서 지역간사들의 추천을 받는 것이 조권이 되므로 그 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3) 간사의 역할과 한계
지금은 학신운동의 활동이나 간사의 활동이 총회의 지도를 받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다. 특히, SFC를 직접적으로 지도하여 온 것 때문에 간사들의 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88년 캠프수련회 후 간사들의 집단행동과 대표간사의 해임이라고 하겠다.
4. 선배 (동문운동)
지도위원과 간사들의 많은 활동으로 선배들의 지도는 소극적으로 변했고, 특이한 것은 간사들의 대부분이 SFC 선배들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교회 어른들과 미묘한 갈등도 선배들이 일선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하므로 빚어졌는데, SFC 간사들이 선배로서 제도 권속으로 들어오므로 그러한 갈등은 해소되었고, SFC 정신에 투철한 여타의 선배들은 강령에서 말하는 국가의 복음화와 세계의 복음화에 눈을 돌리므로 바람직한 SFC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5.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1) 위원, 간사, 지도위원, 동문의 역할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2) 역사의 전환기에서 나의 위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