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SFC 역사

수련회와 관련하여 본 SFC의 역사

노랑 테니스 공 2024. 11. 5. 10:42

※ 이 글은 학신보 제 19호에 실린 글입니다. 원글은 문단을 나누지 않아서 옮기는 과정에 문단을 나누었습니다.

수련회와 관련하여 본 SFC의 역사

김윤태 간사(본부)

1. 들어가는 말

흔히 SFC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학생신앙운동의 역사는 수양회의 역사라고들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히 그 말의 진위를 떠나 그만큼 SFC의 역사는 수련회와 밀접하게 관련하여 진행해 왔음을 강조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SFC는 처음 시작부터가 신앙 수련회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할찌라도 그리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그 가운데서 신앙적 순결을 잃은 한국 교회는 해방 후 중요한 신앙적 전기를 맞게 되어졌는데 그것은 곧 신앙의 순결을 회복하고 한국 교회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게 하고자 하는 회개의 운동과 그로 말미암은 뜨거운 신앙적 각성과 가슴을 가진 사람들의 눈물의 집회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 교회를 향한 뜨겁고도 간절한 신앙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회개 운동과 눈물의 집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굳어진 교권주의자들의 일그러진 심령들은 이들을 도리어 분열주의자로 매도하였으며 마침내는 이들을 스스로 끊어 내 버리기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 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순결한 교회로 설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를 잃어 버리게 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하편 이러한신앙 선조들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가스뫄 불타는 신앙적 열정으로 말미암은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이 신앙선조들의 집회에 함께 참석하였던 학생들은 그들의 심령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한국 교회와 조국을 위한 하나님 앞에서의 불타는 심령을 갖게 되어졌고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학생으로서의 신앙적 사명 각성을 가지고 학생들을 위한 신앙 수련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 수련회를 통하여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오늘날의 이 운동이 생겨나고 그 기틀을 잡게 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신앙운동은 어른들의 조국과 교회를 위한 신앙적 각성과 그로 말미암은 집회를 통하여 그 어른들의 신앙 정신을 이어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어른들의 신앙 수련회를 통해 이어받은 신앙 정신은 그대로 학생들의 신앙 수련회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SFC는 출벌하게 되어 진 것이다.

이후 SFC의 신앙정신과 전통은 이렇게 계속된 수련회 가운데서 계승되고 발전되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이와 같이 수련회를 통해 SFC의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계승, 발절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며 또 유익한 것이라는 생각되는 것이다.

2. 수련회에 따른 SFC 역사의 구분

수련회와 관련하여 SFC의 역사를 구분해 본다면 대체로 5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48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부산 교려신학교에서 약 155명의 기독학생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제1회 수련회로부터 이후 1960년 1월 6일부터 12일까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란 주제 하에 진주 교회당에서 약 479명이 모였던 제17회 수련회에 이르기까지를 제1기로 볼 수 있고,

제2기는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있었던 고려파와 합동측 간의 교단이 합동된 후 1961년 1월 5일부터 11일까지 "처음 사랑을 찾자는 주제하에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약 433명이 모였던 제18회 수련회로부터 1962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주제 하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약 1,336명이 모였던 제20회 수련회에 이르기까지로 볼 수 있다.

또 제3기는 합동 후 다시 3년이 채 못되어 양 교단이 분리된 후 1964년 1월 9일부터 14일까지 "새 역사를 향해서"라는 주제 하에 부산 남교회당에서 약 496명이 모였던 제21회 수련회로부터 1974년 1월 17일부터 23일까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는 주제 하에 대구 서문로교회당에서 약 1,110명이 모였던 제30회 수련회에 이르기까지로,

그리고 제4기는 SFC를 위한 전담 사역자(간사)가 세워진 후 1974년 여름, 대학생들만의 수련회를 따로이 가지게 된 이후 1975년 1월 9일부터 16일까지 "내 민족을 가게 하라"는 주제하에 거창 교회당에서 모였던 제32회 수련회로부터 1982년 1월 대전 생수 기도원에서의 제39회 수련회까지를,

끝으로 제5기는 모임의 수가 더욱 많아져 이제는 더 이상 매년 전국 단위의 중,고,대학생이 모이는 수련회를 개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전국 단위의 수련회는 매 3년마다 개최키로 하고, 그 첫 모임으로 1983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라는 주제 하에 광주 경신여고와 광주 신학교에서 약 1,000여명 이상이 모였던 제40회 수련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구분 장  소 비  고
제 1기 1 1948.08.02-07 고려신학교 / 155명  
  17 1960.01.06-12 진주교회당 / 479명  
제 2기 18 1961.01.05-11 대전 중앙교회당 / 433명 교단 합동 후
  20 0962.08.16-23 서울 승동교회당 / 1,336명  
제 3기 21 1964.01.09-14 부산 남교회당 / 496명 교단 환원 후
  31 1974.01.17-23 대구 서문로교회 / 1,100명  
제 4기 32 1975.01.09-16 거창교회당 대학생대회 시작
  39 1982.01.12-15 대전 생수기도원  
제 5기 40 1983.08.01-05 광주경신여고, 광주신학교 3년 마다 전국 수련회
    오  늘    

3. 수련회와 관련한 SFC 역사의 해석

먼저 제1기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SFC의 특징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정열을 불태우며 그러한 정열로 말미암는 청년 학도의 꿈을 간직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의 SFC는 그야 말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그러한 열정들의 만남, 그리고 그러한 만남 그 자체가 의미있는 그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한 이 대의 수련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회개와 눈물의 장이었으며 신앙으로의 도전과 교회를 위한 헌신에의 다짐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잡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청년 학도들의 지속적인 순수한 신앙운동과 정열의 모임은 교단(고신)의 교육정책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교단의 중, 고, 대학생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육은 곧 SFC 교육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교단의 교육부는 곧 SFC를 대상으로 하며, SFC를 위하여 존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제 2기의 기간동안 SFC는 한국 교회 역사상 두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던 한국 교회를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되었다. 정말 이 시기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청년 학도들의 신앙의 열정과 그 꿈들을 구체적으로 펼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곧 이어 맞았던 하나의 순수한 교회 회복의 기회가 교권주의자들의 일그러진 욕심으로 사그러지고 한국교회는 마침내 4분 5열되어 서로 경쟁의식과 반목 속에서 지나게 되었는데 이 때에 경위야 어찌 되었던 당시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두 교단(고려파와 합동측)이 다시 연합하게 되어졌던 것은 이전의 한국 교회가 범했던 잘못된 교권주의와 지나친 개인 인물 중심으로 말미암은 과오를 씻으며 나뉘었던 교회들이 다시금 순수한 하나의 교회로 회복되는 큰 물줄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양 교단이 합동함으로 말미암아 SFC 운동은 그 야적 규모에 있어서나 조직면에서 방대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때에 조국과 교회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 운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조국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청년 학도들의 모임이었던 SFC는 이 때에는 아무런 기여나 방향 감각도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허락하신 한국 교회를 위한 절호의 기회에 가장 순수한 신앙적 열정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가장 장애 없이 정말로 모든 한국 교회의 앞엣허 온전히 회복된 하나의 교회를 위해 기여 할 수 있었던, 또한 어쩌면 그를 위해 가장 합당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SFC와 청년 학도들은 이를 위한 아무런 목적 의식이나 절박감 없이, 그 뜨거웠던 신앙의 열정과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각오들도 이 때에는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한 채 양 교단이 허물어질 때 함께 허물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실로 학생의 한계와 지도자가 없음으로 말미암는 뼈아픈 아픔과 통한의 시기였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교단의 환원과 더불어 SFC의 조직도 이 때에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이후 SFC 앞에 주어진 또 하나의 조국과 교회를 위해 신앙적 각성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숙제를 남겨 놓게 된 것이었다. 교단이 합동하기 전 SFC는 고려파(지금의 고신측)의 운동으로만 죅되어 있었는데 교단이 환원된 후 합동측에 남게 되어진 많은 SFC의 선배들의 도움으로 합동특에도 SFC가 존재하게 되어졌으며 이는 이 후 SCE란 명칭으로 바뀌어 진 이후에도 서로 똑같은 강령과 정신 위에서 활동하게 되어졌던 것이다.

제 3기에 접어 들면서 SFC는 교단 내에서의 위치와 역할과 관계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교단 교육이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에서부터 말미암는 것이었다. 60년대 중반 이후 교단의 점진적인 발전 및 성장과 더불어 인적자원도 점차 확보되어 외국에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고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교단의 주교교육이 보다 전문화되고 실질적인 양태로 변화, 발전되어야 함의 필요성이 점차 재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4년 에는 주교교육을 위한 전문자들로 교과과정 심의 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965년 12월에는 교단 교육을 위한 전담간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1970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교단의 교육은 더욱 전문화 되어 교과과정 심의 위원회를 교육 연구 위원회로 개칭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교육용 교재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것이 1982년에 이르러서는 오늘의 총회교육 위원회로 발전하게 되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교단과 교단 교육 여건의 변화, 발전 과정 가운데서 교단은이전의 교단의 주교교육이 SFC 교육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교단 교육의 독립성과 전문화를 꾀하게 되여졌던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의 중등부 이상의 주일학교는 곧 SFC였으며 그러므로 중고대학생이 있는 거의 모든 교회에는 00교회 학생신앙운동(SFC)이라는 전체 조직하에서 또 00교회 학생신앙운동(SFC)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고 바로 이러한 이름 하에 매주 모임을 가진 것이 교단 산하 교회의 주교 교육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단적으로 주교 교육의 전문화 노력과 더불어 각 교회에서도 주교 교육의 전문화의 필요성과 함께 점차 교육 전담 교역자가 세워지게 되고 그러므로 교육 부서가 자연 SFC와는 별개의 조직과 역할을 하도록 되어져 갔던 것이다.

이렇게 교단과 교회 내에서 교육부서와 SFC가 이원화 됨으로 말미암아 자연 그 동안 이어져 왔던 수련회의 전통과 정신에도 점진적으로 변화가 초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이전에 각 교회들에 교육부서를 전담하는 교역자가 없을 때에 모이던 지방 단위나 전국 단위의 수련회가 교회나 교단 내에서 차지하던 비중과 역할이 점차 상대화 되어지기 시작하면서 재정적 능력과 조직적 능력이 뒷받침이 되는 대도시의 교회들로부터 점차 이러한 교단 교회의 연합 수련회를 이탈하여 자체적인 모임을 가지게 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점진적인 변화의 추세 속에서도 SFC는 이러한 변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였고 또한 거기에 대처할 만한 SFC의 방향과 역할을 제대로 모색해 가지 못하였으며 그러므로 스련회는 다수 어정쩡한 모양새를 가지게 되어져 갔던 것이다.

제 4기는 SFC 역사 가운데서 중대한 변화가 모색되고 그 변화의 갈림길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시기였다. 이렇게 교단 내에서 SFC의 위치와 역할의 점진적인 변화는 어찌되었건 SFC로 하여금 좋든 싫든 그 나름의 진로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수련회와 관련한 교단 내에서의 SFC의 위상과 역할의 변화는 한편 학생의 한계와 장래 이 운동의 방향 및 역할과 관련하여 지도자의 필요성을 더욱 재고하게 하였고 이윽고 1971년에 이르러 이 운동을 위한 전담 사역자로 김만우 목사님이 초대 간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담 간사가 세워진 후 SFC는 그 사역의 방향이 학원의 복음화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방향의 전환은 SFC 내외의 여건 변화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1974년 4월 4일부터 6일까지 "내일을 위하여"라는 주제 하에 서울 YMCA 캠프장에서 약 90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내일의 사역터인 학원을 위한 vision을 준비하게 되어졌던 것이다.

이후 이렇게 시작된 대학생 대회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우리의 사역의 현장으로서의 학원의 중요성과 현실성을 우리 앞에 드러내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SFC의 사역의 방향과 내용은 이전의 교단교회의 연합 운동적 차원에서 학원의 복음화를 향하여 더욱 구체적이고 전문화된 사역으로 바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나 가운데 이러한 학원사역의 전문성으로 인하여 더욱 이 사역을 위한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후 전담 간사의 숫적 증가와 학원 알돌들의 증가는 이러한 SFC의 학원 사역의 방향을 위한 중대한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