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업 간사 (경북대졸, 대구지역 간사, 포항공대,선린여전 담당, 학신협 간사)
학신협이 구성된지 만 1년이 되어간다. 제 9차 “대학학생신앙운동전국알돌대회”(전 대표자모임)를 앞두고 학신협의 형성과정과 그 위상을 밝혀 전국에 있는 학생신앙운동 운동원, 간사님, 지도위원님, 선배님등 관계자들의 몇가지 오해와 염려를 불식시키고 명백한 “대학학신협의회”로서 당당히 서고자 한다.
학신협의 형성과정을 이야기 하려면 83년말에 있었던 움직임에 대한 소개를 먼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시 본격적인 전임간사 사역이 시작되면서 일어났던 대학학신은 그 몇몇 대학에서 학생신앙운동의 역사이해와 정체성에 대한 의견에 있어서 전국 학신과 달랐다. 이는 83년 여름(’83 전국수양회)에 있었던 간사와 전국학신 간의 이해차이와 함께 엉켜 있다가 83년말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몇몇 선배들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구태의연하게 이어져 오던 수양회 “준비위원회격”의 전국학신의 흐름과 특정교단의 관리 감독을 탈피하고 개혁주의 신앙 운동체인 대학학신으로 자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심각한 염려와 학원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령을 진정으로 구현하는 운동으로 자리잡고자 하는 순수한 몸부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인 움직임은 소수 선배의 반대와 전체 대학 학신의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이미 밝혔던 바 있듯이 전체 학신의 학원 현장에 대한 이해부족, 학신내부의 매우 다양한 정체성을 일원화 하는 작업이 용이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전국학생신앙운동 40년 역사를 한꺼번에 경시하고 출발한 점, 전국 대학 학신을 이끌만한 구심점이 없었던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상당한 기간동안 이러한 논의는 잠적했다. 여기서 잠적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체성과 그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일말의 정리라도 된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내부로 잠재된 채 세월만 흘러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게 논의해 보지도 못한 채 80년의 중반을 맞이한 학신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학원이 격동할 때에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학신은 아무런 방향을 정하지도 못한 채 내부적인 일들에만 급급하였다.각 학원마다 제자화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교육적 노력은 컸지만 정작 살아내어야할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강령적 정체성에 입각한 대응방안을 강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신에 기대를 가지고 들어왔던 상당수의 신실하고 유능한 기독학생들이 좌절과 실망을 안고서 떠나가는 일들도 발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비되지 못한 간사운영체계, 그리고 교단과의 관계에 있어서 드러나는 갈등, 전체적인 정책의 부재등이 큰 몫을 차지 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전국에 있는 대학에서 학신들이 겨우 학원 내의 “기독학생들의 친교모임” 정도의 성격을 벗어날 즈음, 이 정체성과 방향성 문제는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교회의 오랜 열매들로서의 학신 운동원들과 학원에서 양육되어진 운동원들이 몇몇 간사님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학원에서 정착되고, 연결되면서 “학신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되는 것이 88년 말이다. 처음에는 두세개의 대학에서 이러한 논의는 시작되었다. 열심있는 운동원들이 모여 소위 “학생신앙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학신 내에 끌어 들인 것이다. 이것은 80년초와 달리 상당히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89년 1월에 대구 삼승교회에서 열린 전국정기대회 기간 중에 이 논의는 몇몇 소수의 운동원들의 손을 넘어 각 지역대학학신 위원장들의 논의로 발전되었고 나아가서 정기대회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공식화 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제7회 대학학신대표자모임”의 부활인 것이다. 그 때에는 소위 89대회의 개최 여부가 첨예화 되어 이것이 보다 진지하고 광범위하게 논의 되지는 못했지만 2년전 6회 대표자모임을 결정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새로이 부활된 대표자모임의 준비를 위하여 첫번째 모임이 89년 2월 15일에 서울지역대학학신 동기수련회장에서 있었다. 여기서는 각 지역의 대학학신 대표들이 모여 모임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 일의 구체적인 추진을 위하여 연구위원 11명을 위촉하였다. 이러한 모든 계획은 89년 3월 10일에 대구에서 모인 2차 모임에서 몇가지 더 보완하여 제 198차 전국위원회(1989년 3월 11일, 대구명덕교회)에 보고되었고, 여기서 공식적으로 결정, 채택한 후 연구위원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연구위원들은 계속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학신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연구과정에 대한 기록은 7회 자료집의 학신의 정체와 과제글을 참조하면 된다.) 처음에는 5월 경에 대표자모임을 개최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1월로 미루어 광주에서 개최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학생신앙운동 언약문”이 채택되면서 전국적인 학신의 정체성과 방향성은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대학학신의 조직적인 위상에 관한 논란은 검토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게 되었다.
학신 언약문의 의미를 간단히 언급해보면 학신 내의 다양하고 무질서하던 정체성에 대한 정리를 시도하고 일말의 정비를 한 것이다. 우리의 운동이 세상적인 영향을 보다 많이 받게된 지금 우리의 운동이 개혁주의 신앙운동임을 분명히 한 것과 교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한 것, 그리고 복음화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한 것등이다. 학신의 운동은 안팎으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강령이라는 보다 원론적인 것으로는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우리의 정체성을 보다 가시화 한것은 우리를 하나로 엮는 작업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거니와 밖으로 우리의 모습을 선언함에도 크나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 후, 7회 대표자모임의 평가를 위한 연구위원들의 모임에서 대표자모임을 계속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제 8회 대표자모임을 그 시기와 이름을 조정하여 매년 2월 중에 “대학학신 전국대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대학학신에 대한 위상문제가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되어 전국위원회 속에 둘 것인지, 독립적인 단체로 둘 것인지에 대한 이견이 팽팽하게 대립되었던 것이다. 이는 나름대로의 논리와 이유들이 있었는데 전자는 전국학신의 역사 인정, 교회중심과 교회개혁에 있어서 조직의 중요성, 교회학신이 대학학신에 미치는 영향등을 주장했고 후자는 교단운동이 아닌 개혁신앙운동, 조직으로 인한 학신의 한계들, 지난 10년간의 증거들 등을 피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논의는 정기대회(제 42차, 1990년 1월 29일 - 2월 2일,부산동일교회) 때까지 이어져 전자의 주장에 근거한 전국학신 내의 조직으로 규약개정안까지 만들었으나 정기대회 세째날 밤에 최종적인 검토로 모인 연구위원 모임에서 이것을 상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구로 일단 구성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 동안 꾸준히 함께 논의하던 사람이 몇명 빠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참석하여 발언및 표결을 행사함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1990년 2월 15일 - 17일에 서울 영동교회에서 역사적인 제8회 대학학신 전국대회가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17일 오전, 지난 정기대회 기간 중에 결정한 대로 대학학신의 전국적인 협의 기구로 소위 “학생신앙운동 협의회(학신협)”을 창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 조직은 각 지역USFC 위원장을 포함하여 “협의회의원”을 13명으로 구성하고 이 일을 돕기 위하여 담당간사로 유영업 간사를(이것은 지역간사회의 시, 학원의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설명과 함께 학원의 전반적인 일을 이끌어갈 담당간사가 필요하다는 유간사의 건의를 받아 들여 전국학원 정책담당간사로 유영업간사를 내정하였고 이를 학신협에서 받아들여 결정한 것이다.) 학신협 자문기관으로 “연구위원”을 위촉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학신협은 격월 혹은 매월 학신협 정기모임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첫 번째 모임을 대구 사무실에서 가졌다.(3월 2일) 여기에서 앞으로 학신협모임의 내용으로 학신의 방향을 바라보고 개혁신앙으로 무장하기 위한 초청강의와 각 대학학신의 활동보고 및 나눔, 그리고 학신협의 운영방안에 대한 논의 등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전국학신 위원장(강 현복,경북)의 제안으로 두가지 일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조직문제로서 학신협이 전국학신의 학원분과로 들어가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전국학신보와 당시 학신협에서 발간코자 했던 기관지(‘교회건설’이라는 제호는 5월 25일에 결정되었다)와의 병행및 협력문제이었다. 이 때에는 작년이후 줄곧 논의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했었는데 지난번 정기대회 기간 중에 결정하기까지의 상황과 그리고 전반적인 문제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별다른 반대 없이 학신협이 전국학신 학원분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또한 기관지와 전국학신보와의 관계는 각각 독자적인 내용으로 만드는 것을 지양하고 편집체제는 각각 독립적으로 구성하되 학신협기관지에도 학원현장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교회개혁과 건설에 관계된 일들을 전반적으로 싣기로 하고 전국학신보 역시 학원의 정책과 소식을 싣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정을 하였다. 다만 그 성격상 학신협기관지는 연구자료집으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고 전국학신보는 광범위한 홍보지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므로 별다른 문제 없이 서로가 열심히 하면 각각의 영역을 따라 학생신앙운동에 아주 훌륭한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의 구체적인 증거로 학신협은 지난 1년동안 전국학신으로부터 보조금을 2회에 걸쳐 100만원을 지원받았다. 여름에 있었던 농촌선교봉사활동에 50만원, 교회건설지 발간에 50만원이 바로 그것이다. 교건지 역시 어려운 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의 헌신으로 기적처럼 살아남아서 3번에 걸쳐 발간하였다.
여기서 명확히 할 것은 학신협의 조직이 지하에서 은밀히 행해진 것이 아니라 간사회의(당시는 “지역간사회의”였다.)및 전국학신과 정확한 절차와 과정을 밟아서 형성된 것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몇몇 운동원과 간사들의 오해는 대학학신 현장에 대한 긴박감의 차이라고 할까, 역할의 차이라고 할까, 각자 맡은 바 일들이 많고 많은 학신인 까닭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고... 학신협이 그 형성과정을 정확히 밝히는 일의 중요성을 잊고서 공식적으로 학신협의 위상에 대해서 밝힐 기회를 갖지못한 것이 혹 문제가 될 수도 있을런지. 안타까운 것은 학신에서 동역하는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진지하게 물어왔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앞으로 학신협의 위치를 전국학신과의 관계 가운데 더욱 공고히 하며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학원,국가,세계 복음화”를위하여 끝까지 매진 할 것이다. 학신협이 대학학신의 협의기구로서 학원의 현장을 분석하고 개혁신앙적 대안을 모색하며 변하지 않고 나아가도록 성도님들의 기도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이제 학신협은 발족 2기를 앞두고 있다. 학생신앙운동이 최초에 그러했던 것처럼 학신협 역시 운동으로 시작하여 조직 후 일년을 보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을 체계화하고 학신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 가야할 역할이 무엇인지 발견해가며 성취해 가는 일에 있어서 첨병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학신협은 전국학신이 더 이상 어중간한 위치에 머물러 있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전 삶을 드리는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할 것이고, 그 권위에 순종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그의 운동역량에 의존할 것이고, 그의 가르키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나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학신협의 위상은 분명하다. 전국학신과 떨어질 수 없고 다른 단체 일 수도 없다. 동일한 강령을 소유하고서 동일한 과제를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우리의 부르심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동역자들이다. 다만 우리에게 조직적인 짐들이 남아 우리를 나누어 버릴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피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해결해 가야할 과제임을 확신한다. 학생신앙운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목하자.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시는 그 날, 이 일에 대하여 할 말이 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