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강령 구현

복음화 -개혁신학적 이해 -

노랑 테니스 공 2023. 12. 14. 10:43

※ 이 글은 1989년 "제7회 대학SFC 대표자모임 자료집 - 학생신앙운동 정체성과 방향성 정립을 위한-"에 실린 강의안입니다.

김영한 (숭실대 교수 : 현대신학)


목       차

머릿말

I. 복음화의 수직적 차원 :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영혼 구원

  1. 율법주의적 오해 : 도덕주의
  2. 열광주의적 오해 : 완전주의, 축신주의, 현세적 축복주의
    1) 구원파의 심리주의적 열광주의
    2) 베뢰아파의 이원론적 무속적 정령주의
    3) 순복음파의 기복신앙적 성령주의
    4) 미국 TV 부흥 목사들의 스캔들이 주는 교훈
  3. 개혁주의적 이해 : 의인(義認)과 성화(聖化)

II. 복음화의 수평적 차원 : 이웃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세상의 빛과 소금

  1. 근본주의적 오해 : 문화적 도피
  2. 급진주의적 오해 : 사회혁명 내지 눌린 자의 해방
    1) 해방신학의 오해 : 정치적 해방
    2) 민중신학의 오해 : 민중 해방
  3. 개혁주의적 이해 :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III. 현대 복음주의의 복음화 개념

맺는말


머릿말

복음화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수직적 차원이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말하며, 수평적 차원이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기인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말한다.

이 수직적 차원에서 인간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화해 사건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새 사람이 된다. 이 수직적 차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의 과정이다.

수평적 차원에서 중생한 기독자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하여 여태까지 자기중심적 이웃 관계에서부터 그리스도 중심적 이웃 관계로 전환한다. 여기서 기독자는 이 세상을 구속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웃에 대한 진정한 봉사자요,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가 된다.

복음화는 하나님의 사랑 사건의 선포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다. 수직적 차원에서 복음화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선포하면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한다. 복음화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화해 사건이다. 이 구속과 화해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과 주권자 되심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원에서 떠나 자율성 속에 살고 있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다. 수직적 차원에서 복음화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선포함으로써 인간을 향해 이제는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를 위해 그의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라고 선포한다. 수평적 차원에서 복음화는 이 화해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경건한 내면적 자기 독백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요한 사도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리요 라고 말했다. 복음화가 이처럼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상징이 수직과 수평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총강령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복음화의 수직적 차원인 영혼구원과 수평적 차원인 아웃 사랑과 헌신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이란 인간의 자기애의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이란 공허한 경건의 표현에 불과하다.

I. 복음화의 수직적 차원 :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영혼 구원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면전에서(CORAM DEO) 본다. 그리고 하나님 면전에서 인간을 본래적 인간과 현실적 인간으로 구분한다. 본래적 인간이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창조의 본연의 인간이다. 이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이다. 이에 대해 현실적 인간이란 창조 본연의 질서에서 불신앙과 불순종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온 소외된 인간이다. 이 소외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속에 있다.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살았으나 현실적인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갖다 놓고 자신에 대한 자구 되고 있는 자이다. 복음화는 현실적 인간을 본래적 인간(참된 인간)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복음화는 수직적 관계에서 다섯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복음화는 현실적 인간의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시킨다. 복음화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조명에 힘입어 현실적 인간의 이 왜곡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들추어낸다. 말씀의 선포만이 성령의 조명 속에서 현실적 인간의 그릇된 모습, 죄로인한 부패성을 들추어 낸다. 따라서 복음화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조명은 하나님 말씀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하나님 말씀은 인간 속에 침투하시어 인간의 원죄성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시정하실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발견한다.

둘째, 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동반하는 성령의 조명 속에서 현실적 인간은 회개한다. 회개란 감정적 참회나 지적인 오류의 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다.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 말씀에 의해 중생의 사건이 죄인의 영혼 속에 야기한다(벧전 1:23). 회개는 사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 회개의 기반은 신관의 변화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근본적인 가소의 변화를 수행한다. 사고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조로 받아들임 속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윤리를 갖기에 이른다.

셋째, 죄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심으로서 의롭게 인정받는다. 의롭게 인정받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법정적 의(義)의 전가이다. 의롭게 됨으로써 죄인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를 부여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의인(義認)이란 자기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의로운 자로 인정될 뿐이다.

넷째, 죄인은 구원받는다. 여기서 존재론적인 사건이 야기된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은혜와 성경의 권세로 옮김을 받는다. 멸망 속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원한 사망의 신분에서 영원한 생명의 신분으로 바뀐다. 영원한 생명이 부여된다.

다섯째, 신자는 거룩한 삶으로 부름 받는다. 여기서 성화(聖化)의 삶은 시작된다. 이제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신자는 이제 이웃과 사회를 향한 봉사와 헌신으로 부름 받는다. 이것이 신자로 부르심을 받는 이유이다. 이 성화의 삶의 기초는 의인(義認)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적 복음화의 수직적 사건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여기에 4가지 왜곡과 오해는 제거되어야 한다.

1. 율법주의적 오해 : 도덕주의

율법주의에서는 복음화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예수의 계명과의 만남으로 왜곡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해방자요, 새 인간의 창조가가 아니라 새로운 입법자요 율법과 계명의 부여자로 왜곡된다. 이 율법주의에서는 복음화란 죄인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주제화되지 않고, 종교로서의 기독교, 율법부여자인 그리스도가 강조된다. 여기서 복음화란 인격적인 만남이나 새로운 피조물의 사건이기보다는 죄과에 대한 도덕적 수납이요, 회개란 율법이라는 법조문에 대한 죄의식일 뿐이다.

이 율법주의적 복음화의 전형적인 예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바리새인의 신앙과 톨스토이의 신앙 형태 그리고 보수주의적 교회의 신앙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오묘하고 인격적인 생동성, 영혼을 소생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경건했으나 속으로는 중생치 못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영적 모습은 회칠한 무덤이어서 밖으로 볼 때에는 경건한 모양을 지녔으나 속으로는 송장이 들어있다고 비판하셨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그가 받아들인 그리스도는 은혜와 자유를 주시기보다는 율법과 속박을 주는 분이셨다.

오늘날 보수 교회 내에서도 생동적인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보다는 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입각한 인습적인 복음화는 속사람의 변화 없는 겉 사람의 경건 모양만을 연습케 함으로써 복음화가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인습적인 종교적인 놀이로 끝나고 있다.

이 율법적인 복음화의 특징은 신앙의 자유함보다도 신앙의 구속성이 더 강조되고, 감사와 찬양과 헌신보다는 불평과 두려움과 강제가 동반된다. 이 율법주의적 복음화에서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시고 생명과 성령을 주신 구주이기보다는 신자에게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재판관이요, 범법자를 심판하시는 자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복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감격과 헌신이 부재한다. 그 대신 복음은 율법이 되고 짊어지기에 너무나도 무겁고 벗어버리기에는 심판을 두려워하는 짐과 걸림돌이 된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만큼 그리스도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만큼 그리스도는 증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2. 열광주의적 오해 : 완전주의, 축신주의, 현세적 축복주의

열광주의는 복음화를 율법의 폐기, 축신의 전능화, 현세적 축복화로 왜곡하고 있다. 이 열광주의는 한국 교회 내에서 구원파, 베뢰아파, 순복음파의 복음화 이해에서 유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원파에 의하면 중생한 자는 더 이상 죄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죄용서를 매번 간구한다는 것은 아직도 죄사유함을 받지 못한 근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는 몇 날 몇 시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며 이 사실에 관하여 확증이 없는 자는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힐난한다. 구원받는 자는 율법에 초탈한 자이며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구원파는 교회에 나가면서 아직도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자들을 미혹하여 자기 모임에 나오면 구원의 확신을 받는다고 미혹하고, 기성 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난 70년대 중반 당시 권신찬 목사 일파들이 극동방송을 통하여 구원파 교리를 선전하다 한국교회로부터 탈선한 단체로 지적된 예가 있다.

베뢰아파에 의하면 중생한 자는 사탄을 이기는 자이다. 베뢰아파는 복음의 내용으로서 사탄, 마귀, 귀신,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오는 죄와 질병과 고통과 사업의 실패와 지옥과 멸망을 외친다. 사탄을 이기는 일은 예수 신앙이라고 한다.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고,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의 영혼이다.", "귀신은 사람을 먹고 산다." 김기동 목사는 사단이 이 세상에 가득 차서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고 병들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의 설교는 마귀와 귀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얻는 것이 "새소식"이라고 그는 피력하고 있다.

순복음파에 의하면 중생한 자는 방언을 말하고 3박자의 축복을 받은 자이다. 순복음파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강구하노라"에서 삼박자 구원을 설포한다. 그것은 영적구원, 물질적 구원과 신체적 구원이다. 순복음파의 설교는 성령충만에서 오는 현세의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번영과 축복을 강조한다. 성령의 축복은 방언으로 나타나고 물질적인 번영과 신체적인 건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병 고치는 이적을 신도들 앞에서 보여줌으로써 종교적 기적과 은사를 따르는 수많은 대중을 끌어모아내 수십 만 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 구원파의 심리주의적 열광주의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열광주의에 대해서 기독자의 실존은 성화되어 가는 도상에 있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3:13)" 중생한 자는 단 한번 죄 용서를 구할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보혈로써 깨끗이 씻겨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죄용서는 중생과 더불어 은혜로 주어지나 신자는 매일 죄로 더럽혀지는 세마포를 주님의 보혈로서 씻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이미 죄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 더럽혀진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 구원받은 날짜는 바울, 어거스틴, 웨슬레, 루터, 길선주, 김익두 같은 자에게는 명백하지마는 칼빈에게는 명료하지는 않았으나 명백히 온 것은 사실이었다.

구원파는 급격한 회개와 점진적 회개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나의 영이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확증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구원파는 구원을 심리주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구원에 대한 나의 내적 확신이 심리적으로 요동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고, 말씀에 대한 확신, 성령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있다면 비록 현재 구원에 대한 심리적 느낌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구원의 주체는 나의 심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자에게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으로서 새롭게 사용된다. 칼빈은 이것을 "율법의 제3의 사용"이라고 하였다. 중생한 새 사람에게 율법은 정죄하는 사용이 아니라, 중생한 자의 새 삶의 지표로서 새롭게 드러난다.

2) 베뢰아파의 이원론적 무속적 정령주의

베뢰아파의 복음화 이해는 비성서적인 음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근거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대결, 투쟁, 갈등하는 동양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사탄이 이 세상에 가득 차서 사람을 헤치고 잡아먹고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죄와 악으로 가득차 있고 정 붙일 곳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산 성경은 사탄의 세력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사탄 세력도 하나님의 통치 권세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사탄의 이원론적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원론을 말하고 있다. 베뢰아파의 복음화 이해는 무속적인 정령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귀신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전혀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한국 재래의 무속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죽은 자가 귀신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귀신"(evil spirit)은 "악마"(devil, 요일 3:8)와 동일시되고 있으며, "사탄"(satan)과도 동일시되고 있다(막 3:21-30). 김기동 목사의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얻는" 새소식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용서받고 의롭게 인정받는 의인의 복음을 귀신 쫓아냄과 병 고치는 복음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3) 순복음파의 기복신앙적 성령주의

순복음파의 복음화 이해는 죄인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성경적 복음화를 성령의 가시적 은사 받음과 현세적으로 가시적 축복받음으로 변질시키는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기복주의적 삼박자 설포는 신령하고 비가시적인 신의 축복을 가시적인 물질적 축복과 신체적 건강의 축복으로 변질시키는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 자체가 반드시 영적 축복의 결과는 아니다. 사도 바울은 신체적 질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신앙의 가시로 주셨다고, 은혜로 받아들였다(고후 12:7-9). 순복음판의 복음화 이해는 죄인의 회개와 새사람 됨의 변화보다는 신체적인 질병 치유와 방언 등 초자연적 은사가 나타남에 치중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선포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나타나는 치유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는 교인 수의 증가와 교회의 양적 팽창을 위하여, 치유자의 초인적 능력 과시로서 사용되면서 그 본래적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치유는 병든 영혼과 인격과 사고방식의 새롭게 됨이고, 부패한 마음과 도덕성과 윤리성의 치유이다. 그러나 순복음파에서는 치유는 주로 신체적 치유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의 타나남에 치중하면서 치유받은 자의 도덕적 삶, 인격의 변화, 윤리성의 새로움을 외면하고 있다. 순복음파는 성령의 가지거 나타남과 치유와 많은 군중의 집단적 종교심리를 방편으로 하여 은혜를 성령의 역학으로, 성령을 물량화 시키고, 상품화시키고 있다.

이에 우리는 한국교회사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각종 신흥종교가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았던 것(통일교, 박태선, 양도천 운동 등)을 감안할 때 대형교회와 많은 신도 수가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만 볼 수 만 없게 한다.

4) 미국 텔레비전 부흥 목사들의 스캔들이 주는 교훈

우리는 근래 종교 지도자들의 차원을 넘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의 "텔레비전 부흥 목사들"이 잇단 스캔들로 무너지고 있는 불행한 보도를 접하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미국 "텔레비전 부흥 목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이었던 짐 베커 목사가 지난 89년 10월 24일 사기, 공금횡령, 우편물 관계법 등 무려 24개 혐의로 연방법원에서 징역 45년의 벌금 50만 달러라는 엄청난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가 남은 일생을 모두 감옥 안에서 보내게 된 주된 이유는 3백70만 달러에 이르는 공금횡령 때문이다. 그는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을 동시에 방송할 수 있는 종교방송국 PTL의 설립자이자 1억 8천만 달러 상당의 디즈니랜드식의 신앙촌 건립자였다. 그러나 지난 87년 그의 경쟁자 TV부흥목사 지미 스워가트 목사로부터 "배커와 그의 비서인 제시카 양이 지난 80년부터 공공연히 정사를 벌여왔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제시카 양에게 수 십만 달러의 공금을 주었다." 고 폭로당한 후, 그는 거센 비난의 여론에 밀려 PTL 방송 회장직은 물론 출연하던 TV 설교 프로그램마저 박탈당했다. 그에 대한 우문은 최근에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유혹, 모두 1백58만 달러를 모금해서 이를 모두 횡령한 사실도 드러났다.

베커를 침몰시킨 장본인인 스워카도 지난 88년 3월 머피라는 창녀에게 기금을 주고 포르노에서 나오는 장면을 연기하도록 시킨 사실이 밝혀져 자신의 TV 프로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퇴하는 ㄴ장면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미국 TV 부흥 목사 중 랭킹 5위 안에 드는 오럴 로버트 목사도 지난 87년 1월 "이 달 안까지 8백만 달러를 모금 못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때려죽이겠다는 계시를 주셨다."라고 신도를 위협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상 미국의 텔레비전 부흥 목사들에게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설교 내용에 있어서는 성령 체험, 중생 강조, 능력의 치유를 부르짖으며, 주로 순복음적인 성령을 강조하는 자들인데 이들의 삶을 설교와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비 윤리적이고 신흥종교 교주들이 하는 비인간적 행위와 탈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구원파는 일단 70년대 극동방송 사건 이후로는 그 세력이 주춤하고 있으며 베뢰아파와 순복음적인 열광주의는 기성 교회 내에 침투하여 영혼이 인격적으로 변화받고 도덕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복음화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받고 귀신을 쫓아내고 신체적으로 병 고치고 물질적으로 번영하는 신령주의적 기복화로 변모시키고 있다.

3. 개혁주의적 이해 : 의인과 성화

종교개혁적인 복음화 이해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서 4세기의 어거스틴 이후 근 1천 년 이상 동안 은폐된 "은총의 교리가 다시 발견된" 것이다. 종교개혁적 복음화 이해는 4가지 원리를 표명한다. 복음화란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 , "오로지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로지 은총(sola gratia)", "오로지 믿음(Sola fide)"에 입각한다.

복음화란 의인 사건으로 일어난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화해 사건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의해서 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대한 신앙이 죄인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죄인이 그의 종교성이나 경건성의 노력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적 수납에 의해서 이 의인 즉, 칭의 사건은 일어난다.

이 의인의 사건 속에서 루터가 피력한 바와 같이 기독자는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와 해방함을 받는다. 기독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성경적 복음화는 이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율법주의자로부터 해방을 받는다. 구원이란 율법에서의 준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대한 전 인격적 수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율법은 더 이상 정죄하는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 율법은 구속하거나 심판하는 기능을 가지지 않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진리의 빛이요 등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은 송이꿀보다 달며, 기독자의 새로운 영혼과 인격이 매일 성장을 위해 필요하는 양식을 공급한다. 기독자는 종교인이 되거나 율법인이 되지 않는다. 기독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며, 자유스러운 책임인이 되며,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자유와 소명 속에서 사는 자가 된다.

성경적 복음화는 완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기독자에게 율법은 폐지되지 않는다. 기독자는 오히려 율법을 새로운 삶의 빛이요 등으로 더 높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기독자는 의롭게 인정받았으나,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산다. 이것은 죄의 삶의 반복이 아니라 성화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기독자는 더 이상 구원에 대한 심리적인 느낌에 좌우되지 않는다. 의인 사건은 나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오로지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서 모든 심리적으로 다가오는 사탄의 비방과 모략을 견디어 낸다. 왜냐하면 구원은 나의 심리적 사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객관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복음화는 축신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기독자는 끊임없이 사탄과 마귀와 귀신과의 투쟁 속에 던져져 있다. 그러나 축신이 의인 사건의 핵심은 되지 못한다. 축신은 의인 사건의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출현과 사역,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축신의 사건은 결정적으로 수행되었다. 이제 기독자의 해야 할 일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는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복종되어 있다. 귀신은 이미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결박되고, 그의 부활 사건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제 기독자와 교회의 역할은 축신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에 대한 선포이다.

성경적 복음화는 성령주의에 떨어지지 않는다. 기독자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초자연적 치유나 기적을 과시하기 위해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을 증거 했다. 성령은 현세적 축복과 물량주의적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3위이신 인격의 신이시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심과 충성과 온유한 절제이다. 성령의 역사는 초자연적이나 그 열매는 윤리적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받는 기독자는 더 이상 육체의 일 아래 있지 아니한다. 육체의 일은 유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함과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기독자는 이 육체의 일을 싸우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II. 복음화의 수평적 차원 : 이웃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세상의 빛과 소금

복음화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영적 관계를 맺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나와의 새로운 관계일 뿐 아니라 이웃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루터는 기독자의 자유에 대해 "기독자는 영적으로는 모든 것의 주인이요 어떤 것에 대해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신체적으로 모든 자에 종속되어 있으며, 모든 자의 종이다."라고 피력했다. 기독자의 자유란 영적인 구원, 이기주의적 영혼 구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독자는 영적 자유 속에서 신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 기독자는 변화산상에 있는 예수 제자들이 아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의 변화된 모습을 체험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가를 지어 그리스도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살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산 아래 귀신에 얽매어 있는 자를 구원하러 내려가라고 말씀하셨다.

기독자는 두 세계의 시민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민이나 동시에 아직은 하나님 나라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옛 세상의 시민이다. 이 옛 세상 속에서 새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소망으로서 이미 실현되었고 완성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다. 이 옛 세상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사탄과 귀신이 세력을 잡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며, 그의 메시아적 왕적 통치가 그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는 세상이다. 옛 세상은 지나고 있으며 그 속에 새 세상이 메시야적 오심과 더불어 밝아오고 있다. 기독자는 옛 세상과 불연속성과 더불어 연속성의 관계 속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죄와 사망을 담당하시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 악의 권세를 깨뜨렸다는 데 기독자의 이웃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근거가 있다. 기독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낯선 자이거나 고립된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주님이시고,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옛 세상 속에서 여명으로 밝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그러므로 이 세상의 구조적 불의와 부패에 대한 방관자가 아니라 그것을 변혁시켜야 할 소명자고 책임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서 실천되어가고 있으며, 그 나라는 하나님의 메시아 통치와 더불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기독자는 인권에 대한 옹호자이며, 사회적으로 짓눌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며, 사회적으로 가난한고 헐벗고 있는 자의 친구요, 구조적으로 수탈당하고 있으며 불의한 정권과 체제 아래 압제 당하고 있는 소외된 자와 계층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화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수직적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복음화는 구원받은 영혼과 개인이 살고 있는 환경과 사회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도록 부조리하고 불의한 사회의 구조와 여건을 신자 및 의로운 자의 여론 형성과 세력 형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개선하고 변혁시키는 수평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1. 근본주의적 오해 : 문화적 도피

근본주의자는 복음화란 오로지 천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문화적 관계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화란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개인적 관계와 영혼의 구원으로만 간주되고, 이 세상으로부터 퇴각, 죄와 사탄이 지배하고 세상 권세가 다스리는 사회와 문화 영역으로부터 퇴각 내지 비참여 하는 것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신자들은 원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 세상에서 6일간은 생활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부정하면서도 마지못해 이 세상 속에서 부정적인 태도로써 살고 있다. 근본주의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마지못해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불의스러운 방법과 윤리에 몸을 내맡기고, 이 멸망할 세상 속에서 기독자의 사회윤리 및 정치윤리를 펴지 못하고 있다. 근본주의에서는 신자가 영적으로 사는 하나님 나라와 신체적으로 사는 세상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점이나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신자가 교회와 신자 공동체에서 사는 기독교 윤리와 사회와 세상에서 사는 세상 윤리 사이에는 이원론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는 한 개인이 교회 공동체와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한갓 개인 윤리로 머물러 버리고,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와 불의를 변혁시키는 사회윤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상, 신자와 불신자라는 두 영역이 이원적으로 존재하고 양자 사이에는 연결점 없이 분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오해는 교리사적으로 터툴리안의 반문화적 사상에서 대표되고 있다. 터툴리안은 사회와 국가란 인간의 원리가 전승되는 곳이므로 철학, 예술,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영역에 기독자가 참여하게 될 때, 이 세상과 영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에 와서는 19세기말 미국에서 자유주의 사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종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이 세상 속에서 기독자의 사회문화적 책임과 참여를 세상 사조와 영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 교회의 선교를 받은 우리 한국 보수주의 교회도 이러한 근본주의적 이원론적 시각 속에서 이 세상을 죄 많은 고해로 보고, 기독자의 사회 및 정치적 역할을 소극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2. 급진주의적 오해 : 사회혁명 내지 눌린 자의 해방

급진주의자는 복음화를 사회혁명 내지 눌린 자의 해방과 동일시하고 있다. 급진주의자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만을 강조함으로써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혁명하는 데서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찾고 있다. 여기에는 민중신학의 유형과 해방신학의 유형이 있으나, 양자가 모두 사회의 부조리를 구조적으로 혁명하자는데 공통점을 갖는다.

1) 해방신학의 오해 : 정치적 해방

해방신학은 남미의 전통적 가톨릭 교회가 서구의 식민정책과 결탁함으로써 남미의 경제적 종속구조와 사회정치적인 부조리한 구조를 근본에 있어서 변혁시키기 위해 60년대에 일어난 신학적 이데올로기이다. 이 해방신학은 기독교 하나님을 노예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봉건왕조로부터 해방시킨 해방의 신으로 보고,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노예 해방기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제목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보며, 초대 교회를 억눌린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공동체로 본다.

해방신학은 성경을 사회경제사적 해방사건의 전기로 보며, 원리를 사회경제사적 부조리한 구조에 있다고 보며,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지배 세력과 대결한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하며, 하나님 통치의 도래를 기존 세력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변화의 역동성을 초래하는 사회정치사적 사건으로 본다.

여기서 해방신학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노예 해방의 신으로 봄으로써 기독교신이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속자 되심을 간과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출애굽의 사건은 단순히 노예 반란의 사건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시는 아브라함에 대해 4백 년 전에 행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구속의 사건이다.

해방신학은 이 구속 사건의 성경을 지니는 출애굽을 단순히 사회경제사적 이데올로기로 변모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세주라기보다는 억눌린 자의 해방자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해방자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은 예수를 성경 증언처럼, 죄인의 구주로 보지 않고 사회적 부조리와 불의를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해방자로 변형시키고 있다.

여기서 복음화란 더 이상 죄인이 의롭게 인정받는 사건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적인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도록 하는 정의로운 행동이고 정치적인 투쟁이다. 여기서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원리의 존재론적인 성격은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되어, 사회구조론적인 불의와 모순으로 왜곡되어진다. 여기서 개인의 원죄와 윤리적 부패성은 사회정치적 부조리 구조 속에서 해소되어 버리고, 개인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은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도 개인들의 모임이나 집합 없이 성립되지 아니하므로, 사회의 구조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부조리와 도덕적 결함과 원죄로 귀착되지 아니할 수 없다.

2) 민중신학의 오해 : 민중 해방

민중신학은 60년대 남미에서 일어난 해방신학이 학국적 상황에 적용됨으로써 70년대 한국의 유신체제라는 정치적 억압 상황하에서 일어났다. 민중신학은 성경 텍스트보다도 자의로 선별한 학국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맥락(홍경래 난, 동학 난, 3.1 운동 등)을 더 중요시하며, 민중의 구체적인 한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민중신학은 강대국에 의하여 900번 이상이나 외침을 받아 짓밟히고, 탐관오리에 의하여 수탈된 민중의 한을 풀고, 민중의 해방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해방신학처럼 민중신학도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적인 부패를 강조하고, 개인의 죄 대속보다는 사회적인 악의 변혁에 강조점을 두고, 특히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사회적 부조리의 변혁을 시도하고자 한다. 해방신학이 신을 역사의 진보 과정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를 억눌린 자의 해방자로 보며, 하나님 나라가 무산자의 계급투쟁에 의하여 역사 속에서 이상향으로 실현된다고 보는 것처럼, 민중신학도 신을 역사와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의 신으로 생각하며,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하고, 하나님 나라를 차안적이고 사회정치적인 천년왕국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복음화란 개인의 영혼구원이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의 해방이요,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해방으로 이해되어진다. 민중신학은 복음화에 있어서 죄를 사회적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으로 이해한다. 죄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부치는 "딱지"라고 사회,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화 해버린다. 민중신학은 죄대신 한(恨)을 핵심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예수의 삶과 죽음의 목적이 자기를 한의 민중과 동일시하고,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타력적 구원" 대신에 민중 자신이 구원의 주체가 되는 "자력적 구원"을 말한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예수가 "민중 속으로 내려와 자기를 민중과 동일시" 했기 때문에 전통 신학에서처럼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속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재연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복음화에 있어서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민중이며 민중이 스스로 예수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복음화에 있어서 수평적인 차원인 사회적 부조리한 구조의 변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 수평적 차원을 가능케 하는 수직적 차원인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전혀 도외시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복음화를 사회 경제사적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키고 있다.

3) 개혁주의적 이해 :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서 출발한다. 이 절대주권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 속에 지배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은 복음화에 대한 근본주의적 오해를 시정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세상의 현실에 들어와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 이 하나님 절대주권사상 속에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이분법적 사고 내지 세상과 천국이라는 두 공간 사고는 훼파된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나 여전히 이 세상의 주님이시고, 천국은 종말론적 실재이나 여전히 세상 속에서 실현 속에 있다. 그러므로 겨혁신학은 우리의 삶과 문화 영역에 대한 신자의 책임을 강조한다. 가정, 직장, 국가, 교회는 본 훼퍼가 피력한 바 같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위탁한 네 가지 주권적 위임 영역이다. 이 속에서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도록,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도록,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치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은 급진주의적 오해를 방지해 준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급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몰역사성 속에 있었던 보수적 기독교회를 향하여 역사의식 강성, 교회의 사회적 양심과 책임 각성, 신학의 현실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그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자는 성경과 전통 신학이 강조하는 바 "종말론적 유보(proviso)"를 등한시하고 있다. 이 개념은 하나님 나라란 인간이 이 지상에서 세우는 어떠한 사회나 체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민중이나 프롤레타리아가 부조리한 사회체제와 구조를 전복시키고 세우는 민중의 왕국이나 프롤레타리아 이상향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의 택하신 인간을 통하여 그의 나라가 근접해 나가 지상적 모형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시나, 궁극적 정의와 사랑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역사와 종말의 절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에 민중과 억눌린 자의 주체적 혁명을 설정하는 오만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해 있으나 역사 속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의로운 사회참여와 정치행위를 통하여 실현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이나 동시에 내재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 속에서 기독자의 역사참여를 통하여 근사치(Approximation)적으로 근접될 수 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근사치적 성격은 기독자의 사회참여와 문화개혁과 정치참여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기독자의 역사참여가 절대화되지 않고 상대화 되도록 규제하는 신학적 행동원리이다. 성화(聖化)의 삶이란 단지 의인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개인의 자기 성숙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웃과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를 의인적 기초 위에서 성숙시키고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기독자의 사회참여와 정의실현이란 이 성화의 과정으로 표출된다.

III. 현대복음주의의 복음화 개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구라파에서 유행한 문화기독교주의와 미국에서 유행한 사회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 민주주의와 동일시하여 사회적 프로그램에 의하여 이 지상 위에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적 현대주의(Theological Modernism)에 대한 응답으로서 출현한 "복음주의적 근본주의"는 현대주의 도전을 거부하고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요소를 재확인하고 재천명하고자 하였다.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Fundamentalism Movement)은 구 프린스톤 신학(B.B. 워필드, 찰스 하지 등)과 세대주의 신학(D.L. 무디)의 공동전선으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천년왕국을 재확인했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주의 운동은 "근본요소들(Fundamentals)"이라는 12권으로 된 학문적으로 우수한 소책자들을 출판하면서 성경적 진리를 수호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1930년 이후부터 근본주의 운동은 초기의 열정적이고 성경적 진리 수호의 입장에서 변모해서 칼 헨리(Carl F. Henry)가 지적한 바 같이 배타적이고 편협하고 분파적인 입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신근본주의(McIyntire를 중심 한)는 전투적 자세 및 반지성적 자세를 가지며, 개신교 주류에서 추퇴했고, 사회 참여는 복음 전파를 약화시킨다고 보고 사회정의에 무관심하였다.

1940년대부터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은 분파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복음 신앙과 입장을 재천명하면서 복음화의 우선적 과제와 복음주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온건한 복음주의 운동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42년에 조직된 "미주 복음주의 협의회(C.N.A.E)"와 1952년에 조직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는 온건한 복음주의 운동을 세계적으로 주도하였다. 1950년대부터 빌리 그래함(Billy Groham)은 성경의 권위, 인간의 윤리, 그리스도 신앙과 헌신을 전파하면서, 세계적으로 교파적인 복음주의의 연합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래함의 복음화는 개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중생시키는 개인전도와 신자 개인의 윤리적 삶에 강조를 두고 교회의 사회 및 정치참여를 부정하는 바 수직적인 복음화에 머물렀다.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1961년 뉴델리 제3차 WCC 총회 때부터 과격한 형태의 정치사회를 주장하기 시작하고 1968년 웁살라 제4차 WCC 총회에서는 교회의 주된 사명이 복음화(전도, 개종, 교회설립, 예배 등) 라기보다는 사회정치 참여(사회정의, 인권, 민중, 교육, 인간복지, 기근 등 세상사의 문제 해결)에 있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1970년도 초부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 개인적 관심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보다 적극적 사회적 관심 표명은 1973년 시카고 선언과 1974년 로잔언약에서 나타났다. 1973년 "시카고 선언(The Chicago Decalration)"에서 론 사이더(Ron Sider) 주도 하에 모인 50여 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아울러 기독자의 사회, 경제,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촉구하였다. 1974년 존스토트(John Stott)에 의해 주도되고 세계 각처에서 모인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서명된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은 복음화의 우위성과 더불어 사회참여를 복음화의 불가분적인 연합과 동반자를 규정함으로써 복음주의 신학이 사회참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로잔언약"은 제5항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에서 20세기의 복음주의적 서구전통이 현대주의와 사회복음주의에 대한 반발로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히 하고 복음화와 사회적 관심을 상호배타적으로 간주해 온 것을 참회"하며, "복음화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기독자 의무의 두 가지 부분을 주장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로잔언약은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이 하나님, 인간,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복음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을 요청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창조자이시며 심판주이심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 사회 안의 공의와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해야 하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또한 기독자의 하쇠적 책임을 요청한다.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색깔, 문화, 계급, 성, 연령에 상관없이 본질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존경과 봉사를 받아야 하며 착취를 당해서는 안된다."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는 또한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을 요청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들은 그의 왕국에 새로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개인적 및 사회적 책임 전반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변혁시키는 세력으로 나타내야 한다."

여기서 로잔 언약은 영혼구원과 사회참여를 동반자적으로 보고 있으며, 사회참여는 복음화의 결실로 나타나는 것임을 천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주의를 영혼구원과 사회참여를 그 핵심구조로 하는 포괄적인 복음화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절대주권, 성경의 영감과 절대권위, 인간의 전적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적 죽음,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체험, 성화와 경건한 삶, 복음화와 선교의 사명, 사랑과 봉사와 균형 잡힌 사회 참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믿고 선포하고 이에 상응해서 사는 현대적인 기독교 사상운동이다. 

맺는말

한국교회 내에 있어서는 복음화에 대한 두 가지 약극적 이해가 아직도 상존해 있다. 보수적 교회는 복음화를 영혼구원으로만 보고 있으나, 진보적 교회는 사회정의구현으로만 보고 있다. 보수신학은 복음화를 중생과 개인구원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으나, 민중신학은 복음화를 억눌린 민중의 한풀이와 해방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화가 개혁주의적 구조, 수직적 측면과 수평적 측면에서 균형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보수교회와 보수신학은 사회정의 실현과 억눌린 자의 해방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구조의 개혁을 부르짖는 자를 반체제주의자 내지 복음에서 이탈한 자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회구조의 부조리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진보적 교회와 민중신학은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산출한 개인의 윤리와 죄과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개인구원과 영혼의 중생을 역설하는 자를 친체제주의자 내지 기독교적 교조주의자라고 냉소하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지난 27년 군사정권 시기 중에 나타나 심화되는 가운데 있고, 양자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부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금 1974년 로잔언약의 영향을 받은 한국복음주의협회와 복음주의 신학이 성경적 기반 위에서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을 진지하고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통일 문제나 사회 문제에 있어서 극단적 입장을 수정하고 있는 태도는 앞으로 양극적 대립에서 상호보완하는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갈 징후로 보아진다.

영혼구원과 사회참여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화가 지니고 있는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요소이다. 한 개인이 구원받았으나, 그 개인이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사회도 역시 그것의 모든 불의한 구조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또한 그의 불의한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의 변혁은 단지 제도의 개혁이나 정책 입안에 의해서만 실현되지 않고, 그 정책을 수행하는 개개 구성원이 복음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받았을 때만 비로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개개인의 자유와 창의성 존중과 인권성 존중과 변화의 전제 없이 강권에 의해 제도적으로 수행된 공산권 국가의 스탈린주의가 오늘날 고르바초프의 새로운 사고 -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인정하는 사회주의적 사고 - 에 의해 대체되면서, 동구권에서 20세기의 황혼과 더불어 사멸해 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개혁주의적 복음화는 그러므로 전인적 구원(The Wholistic Salvation)을 지향한다. 전인적 구원이란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과 문화적 구조까지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