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SFC 역사

학생운동, 기독학생운동과, 『학생신앙운동』

노랑 테니스 공 2023. 12. 22. 14:15

※ 이 글은 1989년 "제7회 대학SFC 대표자모임 자료집 - 학생신앙운동 정체성과 방향성 정립을 위한-"에 실린 주제발표문입니다.

김동춘 (경북대 SFC)

1. 들어가며

'학생운동' 이라 했을 때, 사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캐임브릿지 7인이나 영국의 기독학생운동, 한국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러 민족운동을 주도한 기독학생운동 등의 긍정적인 기독학생운동을 떠올리거나, 일본의 적군파나 영궁의 신좌파운동, 화염병과 폭력이 연상되는 한국의 학생운동 등 부정적인 모습의 학생운동, 그리고 일반 학생운동 중에서 4.19 혁명이나 광주항쟁, 6월 항쟁 등의 긍정적인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같은 용어라도 동상이몽을 하게 되는 것은 학생운동의 복합성, 다양성 때문이다. 할생운동은 특수한 사회적 위치에서 전개되는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성격을 띄어 세계 학생운동과 한국 학생운동은 동일선상에서 연상작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학생운동이 왜 '학생운동'으로 연상이 되는가하면, 기독학생운동도 결국 학생의 신분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파급효과에 따라 학생운동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성을 가진 학생운동에 대한 고찰은 학생 특유의 사회적 위치와 성격,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필자는 학생운동, 기독학생운동의 개별적 고찰이 아닌 두 운동이 맞닿은 역사를 주로 다루며, 그것에서 학생신앙운동의 교훈을 찾으려고 한다.

2. 일제시대

이 시대는 학생신앙운동이 태동하지도 않았고 기독학생운동은 분파적 성향을 떠나 종합적이고, 연합적인 성격을 띄었기 때문에 이때의 학생운동은 바로 기독학생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초의 탈봉건주의, 민족 자주 독립, 개화, 근대화, 서구문화의 도입을 목적으로 출발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식하에서 일본으로 유학간 학생들을 위하여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리고 1907년 종교부 간사인 이상재 등의 활약으로 국민의 눈이 온통 기독교에 실리게 했다. 또한 1897년부터 감리교 정동교회에서 출발한 엡윗 청년회는 감리교 상동교회의 청년학원과 함께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 두 단체의 공헌으로 신민회 창설, 국학운동의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3.1 독립운동은 한국 한국 사람 전체의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단체가 선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행심은 기독교회를 경로로 하고 있으며, 추진세력의 힘은 역시 기독청년학생이었다. 3.1 운동의 모태가 된 동경 유학생 중심의 독립선언이 발표될 때 그 회집의 장소가 바로 가독청년회관이었고, 3.1 운동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된 자의 반수가 20-30세 층의 청년이었으며 또한 그 반수 이상이 기독청년학생이었던 것이다.

3.1 운동 후 기독청년학생은 YMCA를 주축으로해서 사회개혁의 의지를 다졌다. 1920년대의 '조선물산장려운동', '농민운동 등은 바로 기독학생들이 선봉에 섰고, 일부 기독청년들은 소작쟁의를 지도하여 일제와 결탁한 지주로부터 농민의 권리를 지키고 신장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여기에 발맞추어 기독청년학생들의 주도적인 민족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됭, 1920년 정동예배당에서 1,000여명의 학생들이 조선학생대회를 개최하고, 1923년 조선학생회의 창립총회, 1924년 조선총학생연합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의 계승으로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30년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더욱 극성해지자, 한국교회는 다계적, 현실도피적 신앙관을 견지하고 많은 의식있는 기독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기에 이르러, 기독학생운동은 신사참배 등에서 조직적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게 된다.

3. 해방 이후 4.19 혁명까지

역사의 흐름은 직선적이며, 그 목적은 구속사이다. 하지만 역사는 구속사 외에 세속사도 존재한다. 하나님이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셨고 그 의미가 구속이라면 이 역사상에 일어나고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즉, 세속사마저도 하나님의 통치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동 시대의 사건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사건이 영젹이냐 영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이원론적인 사고며, 다만 어떻게 영적인 요소를 투입하고 발전시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4.19 혁명을 보고자 한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기독교회는 정교유착이라는 큰 실수를 범한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무조건 지지하는 등 추태를 보였으며, 1960년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시대착오적 판단을 범한다. 그 당시 한국 교회는 교권주의에 의해 교파가 분열 되었기 때문에 자유당 정권의 권력남용과 연장을 위한 온갖 반민주주의적 작태를 방치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대통령, 부통령들이 기독교인이었고, 고관의 많은 수도 기독교인이어서 마치 기독교가 한국의 국교나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던 한국교회가 그 착각 속에 개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4.19 혁명인 것이다.

이 때의 기독학생운동은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명)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SFC는 전혀 딴 영역 속에 있었다. 이 때의 SFC 위치는 「학생신앙운동 이념과 실제」에 의하면 '(1954.8-1963)IV. 성장기'라고 되어 있다. 순수한 기독학생운동인 SFC가 독자적인 성장을 다졌다는 점에서는 "성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신앙운동이 한국적인 기독학생운동으로서 한국적 상황에서 일어난 회개운동이라는 점에서는 4.19 혁명에의 역할이 너무나 미흡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정조가 유린된 것을 보고 일어난 회개운동인 학생신앙운동이 이승만 정권과 공범인 한국교회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음에도 이 시기를 "성장기"라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부끄러움을 자아낸다. 물론 당시의 학생신앙운동이 제대로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개인 학생자격으로서의 4.19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17회의 전국 수양회까지 치룬 SFC로서는 너무나 미흡했으며, 이는 SFC 역사에 대한 재고의 여지를 던져준다.

4. 3공화국에서 5공화국까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남한 국민의 대다수는 정치적 무능력과 사회적 혼란을 걱정하던 때라 그 혁명을 환영하였고, 군사정권의 조기 종식과 민정으로의 조기이양 약속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이 때 한국교회협의회(NCC)와 대다수 교회들도 이 혁명을 환영하여 일부 교회 지도자는 미국에 사절단으로 까지 가서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다만 1962년 민정 이양의 약속이 지연되자 교회협의회는 그것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낸다. 1963년 10월 제3공화국, 1965.7.1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등의 과정에서 교회는 박정희 정권과 소원해졌다. 서울의 240여 지도적 교역자는 구국 위원회를 조직하여 "한일협약 비준 반대성명"을 내고 구국기도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윽고 70년대는 기독학생운동이 뚜렸한 구별을 가지고 나타난다. 즉, 진보계열의 기독학생운동과 보수 계열의 기독학생운동이다. 진보계열의 기독학생운동은 일반학생운동을 주도하거나 혹은 병합되어 나타난다. 거기에 비해 복음주의로 대표되는 기독학생운동은 "엑스폴로 74"의 민족복음화운동에 발맞추어 정치참여나 현실참여를 외면한 채 폭발적 부흥을 맞게 된다.

1974년은 기독학생운동의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위에서언급한 "엑스폴로 74" 이후의 복음주의 대부흥은 어쩌면 '민청학련' 사건이란 진보계열 기독학생운동의 고난에 따른 반대급부인지도 모른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란, 1974.4.3 박 대통령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며, 전국대학생연합, 종교인, 제야인사, 4.19·6.3 세대 선배를 규합한 대규모 민청학련 조직이 공산주의식 인민혁명 수행을 기도했다고 1,024명이 조사를 받은 사건이다. 이는 수사하기도 전에 민청학련이 공산주의적 인민혁명을 수행하려고 했다고 결론지음으로서 여론재판을 했다는 것이 요즘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 사건에서 구속자 253명 중 50명이 사형 및 무기 징역 등 중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중 진보계역 기독학생단체인 KSCF 간부 및 임원들이 거의 검거되고 KSCF는 기능이 마비된다. 바로 이 해 8월에 "엑스플로 74 : 기독교 세계 복음화 대회' 가 여의도에서 개최되고 복음주의 계열 특히 CCC, 네비게이토, UBF 등이 큰 붐을 타게 된다.

민청학련 이후 KSCF는 역량이 급격히 쇠퇴하고 교단 학생연합형태인 EYC(기독청년협의회)로 운동양태가 옮겨진다. 이런 KSCF와 EYC 관계는 학생신앙운동의 비전에 중요한 힌트를 주는데, 이는 쥐에서 언급될 것이다.

KSCF의 바통을 넘겨받은 진보적 기독학생운동은 진보적인 신학대학으로 넘어간다. 74년 후반기 이후 서울신대, 한신대, 감신대 교수와 학생의 횃불시위, 기도회 등을 통해 다시 학생운동의 불을 붙였다. 1977년에 한신대 학생들은 '고난 선언서' 를 배포하기도 했다. 1979년 11월 19일 EYC '기독청년민주화 선언 선명서 발표' 11월 24일 KSCF 기념강연회 사건,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서 많은 진보계열의 기독청년학생이 구속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1980년 5월 7일 한신대 150명은 채플을 끝낸 후 기도회에 들어가 비상계엄 해제를 주장한다.

이후 518 광주항쟁을 겪게 되고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5공화국의 학생운동과 기독학생운동은 우리가 잘 아는 것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5. 기독학생운동과 학생신앙운동

1974년 민청학련 이후 캠퍼스에선 KSCF의 퇴락과 함께 국제조직의 영향 아래 결성된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CCC, 네비게이토와 UBF 등이 큰 붐을 탔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이런 맥락으로 국내의 기독학생운동을 총체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진보주늬 기독학생운동인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는 뚜렷한 신학적, 교회적 배경을 가진다는 점에서 학생신앙운동과 유사점을 가진다. 비록 운동에 대한 정체성이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교회를 토대로 주관심분야인 학원선교를 한다는 점에서 주목이 필요하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KSCF는 NCC 소속 교단의 기독청년협의체인 EYC와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KSCF는 내부적으로 헤게모니 싸움과 기독성, 운동성에 대한 정체성 혼란으로 진통을 겪다가 작년들어 총무 인선 문제로 진통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다.

학생신앙운동은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 앞에선 철저한 죄인으로서이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 영역 주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요소 '영적, '조직적' 즉, '영적인 조직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KSCF와 EYC와 조화된 관계에서 우리는 교단과 학원선교의 정비된 관계가 필요하다. 학원 SFC는 학원 내 Para-Church로 기능하면서 교회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한편, 교회는 학원SFC에 대해서 선교적 지원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KSCF는 70년 대에 벌써 간사제도가 정착되고, 신학에 대한 주체적 정립이 있었다. 그에 비해 SFC는 10년이나 늦게 간사제도가 정착되고,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활발한 노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간사제도의 확고한 정착, 개혁주의에 대한 주체적 정립은 늦지 않다. 한편, 국제조직의 복음주의 계열인 CCC, 네비게이토는 80년대 이후 심한 정체를 맞고 있는데, 이는 70년대 중반 - 80년 초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구태의연한 선교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70년대 후반 이후 시대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진전되고, 현실은 사회 부조리, 국가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데 그저 단순히 '예수 - 구원'이라는 도식화된 선교전략을 가지므로 많은 의식있는 학생이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학생신앙운동은 폭넓은 전략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전도에서, 기독교세계관, 현실참여 등을 모두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의 결정적인 착안은 IVF에서 찾아 볼 수 있다.

IVF는 80년 대에 한국에서 급성장했다. 이는 '젊은 지성인 복음화'라는 기치 아래 적극적인 문화관,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하여 의식있는 젊은이들의 감성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케임브리지 7인에서 출발한 IVF 운동이 WSCF, CICU, SVM으로 갈라진 역사적 교훈을 직시해야 한다. 즉, 학생신앙운동이 철저한 개인적 영성(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을 포괄하는 정체성과 방향성을 아울러 가질 때,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꿋꿋이 지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6. 마침말

학생운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족사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그것은 역기능이라기 보다는 순기능적 측면이 강하다. 진보주의 기독학생운동도 나름대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며 학생운동의 대열에서 혹은 대열 밖에서 몸소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학생신앙운동은 어떤가? 우리가 배우는 개혁주의가, 기독교적 세게관이 우리의 행동을 제한하였는가?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학생신앙운동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안주해 너무나 타성에 젖었고 안일에 젖었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명이 있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영적', '영적' 이라며 이원론에 빠졌었다.

학생운동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구성체론', '변혁주체론', '모순구조' 분석을 했건만, 우리는 기독교 변증에 너무나 미흡했다. 설령 개인적으로, 산발적으로 운동을 했다하더라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지 못한 점은 반성해야 한다.

아울러 진보계역의 기독학생운동에서도 교훈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했든 아니했든 간에 우리는 그 순수하고 적극적인 열정, 민족의 아픔을 짊어지려는 자세, 현실 비판 의식을 배워야 하겠다. 비록 그들이 우리의 신앙관, 신학관에 맞진 않지만 배타적으로 그들을 매도해선 안될 것이다. 학생신앙운동이 유형교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혹은 학원의 미폐된 공간에서 자기동질성(?)을 확인하고 있을 대, 동시대에 고통받는 철거현장, 노동현장, 농촌현장에서 아픔을 나누려 하고 이 땅의 모순을 짊어지려는 자는 누구였으며, 누구여야 하는가?

이제 학생신앙운동은 학생운동과 진보적 기독학생운동 앞에서 적극적 대탄을 가지고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로서 '변화된 학생운동'을 제시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

(1) 우선, 기독교변증학에 기초한 ' 기독교적인 점전적 변혁론'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생운동사', '기독학생운동사', '기독교 세계관' 을 위한 공부 모임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광주의 '포도송이', 대구의 '개혁신앙실천모임'이 그러한 모임의 대표적 예이다.

(2) 캠퍼스에 강력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건설해야 겠다. 다단순히 신우회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동지적 결합으로 민족과 교회 앞에 운명공동체 임을 자각하는 모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열심있는 '말씀연구'를 통해 영적 무장이 먼저 되어야 겠고, 그러한 열정 에너지를 가지고 캠퍼스에 만연된 인본주의적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물들면 어쩌나' 하는 소시민적 자세가 아닌 학원복음화의 실현이라는 강한 동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 공동체는 과, 단대, 총학으로 확산해서 총회나 선거에 선한 영향을 미쳤으면 한다.

(3) 현실참여의 자세를 확립한다.

   1) 일상적 현실참여 : 철저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청지기적 자세로 살고, 학우관계, 선후배 관계, 사제관계, 기타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고 주변의 잘못된 모습에서는 개혁의지를 가지고 임해야 겠다.

   2) 봉사적 현실참여 : 캠퍼스 속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호나경미화 작업을 하거나, 고아원, 양로원, 장애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특히, 방학 때는 수련회에만 매달리지 말고 야학, 농활, 공활, 봉사활동 등에 참여해서, 몸소 땀흘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전하는 것이다.

   3) 윤리적 현실참여 : 캠퍼스의 비윤리(컨닝, 대출, 언어생활, 문화생화, 대자보 독점 등)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발하고, 사회의 음란, 퇴폐문화에 대해서도 캠페인, 권고, 고발 등을 통해 윤리적 현실참여를 할 필요가 있다.

   4) 구조적 현실참여 : 시국과 관련된 일시적 참여와 지속적 참여가 있다. 일시적 참여는 특별한 이슈에서 기독교적 대안이 애매할 때는 관망과 함께 '진상조사', '사실규명' 수준에서 머물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성경적 원리에 명백히 벗어날 때는, 적극적 참여나 주도적 참여를 해야 한다. 특히 위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민감히 반응할 책임이 있다. 지속적 참여는 어쩌면 기존 학생신앙운동이 잘 감당한느 것이다. 즉,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식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이 타락하여 원죄성을 가진 이상, 이얷이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현실참여이다. 하지만 구조악에 대해선 구조선으로 이길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학생신앙운동의 동문운동에 꼭 필요한 것이다. 즉, '군인신앙운동', '교사신앙운동', '정치인신앙운동', '노동자신앙운동', '경제인신앙운동' 등 개 기독인마다 각각 처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