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SFC 역사

한국기독교사 속에서의 학생신앙운동

노랑 테니스 공 2023. 12. 21. 16:25

※ 이 글은 1989년 "제7회 대학SFC 대표자모임 자료집 - 학생신앙운동 정체성과 방향성 정립을 위한-"에 실린 주제발표문입니다.

김성수 (서울대 SFC 위원장)


목  차

1.머리말

2.한국교회사 요약
   1) 전래
   2) 수용과 초기의 성장
   3) 사회변화와 시련 속에서의 한국교회
   4)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와 선교 100주년의 의미

3.한국기독교회사의 특징들과 반성점들
   1) 급격한 성장과 서구화의 과정
   2) 신학의 부재
   3) 분단의 상황

4.한국교회사 속에서의 학생신앙운동의 위치
   1) 본질적으로 학생신앙운동은 회개운동으로 출발했다.
   2) 학생신앙운동은 신앙운동, 선교운동이다.
   3) 철저한 교회 중심의 운동

5.맺음말


1. 머리말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초월적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즉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의 역동성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학 전공자도 아니로, 더우기 교회사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 한국기독교회사를 나름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야길 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만 이야기 하거나 개인적인 견해임을 견제하지 아니 않을 수 없다.

나름대로 교회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인간의 철저한 죄임됨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역사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자랑할 것이 없으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만은 자랑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학생신앙운동을 세우셨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고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는 우리의 운동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사 속에서의 올바른 위상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겠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진리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전파되어지고, 전개되어지고 있는지를 민족사라는 큰 틀에서 조명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결하고 역사나 민족 앞에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학생신앙운동의 사명과 위상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2. 한국교회사 요약

   1) 전래 (1884년 이전)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전파를 주장할 수 있으나 아직은 가설로 머무르고 있고, 최초로 우리나라가 복음과 접촉한 것은 17세기 학문적 관심으로 유입된 로마 카톨릭이다. 이 천주교는 1784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이후로 많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이 생명력을 왕성히 하여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을 가능케 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개신교의 전래는 다음의 네 가지 경우로 그 경로와 순서가 설명될 수 있다.

①귀츨라프나 토마스 선교사 등의 중국을 통한 접촉의 시도 단계
②만주지역에서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 중심의 성경 출판과 전도사업, 1879년 조선인 4명이 최초로 세례를 받고 이들은 성경 번역과 신앙 공동체 형성에 많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③ 1882년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세례를 받고 개종한 이수정 중심의 성경 출판과 선교사업
④ 미국 선교부의 국내선교로 국내에서의 복음 전도가 활발하게 되는 단계.

지금까지의 교회사는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지나친 비중을 둔 감이 없지 않다.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과 서북 지방에서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한 최초의 수세자들과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성경번역 등은 한국인 스스로의 주체적 기독교 수용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2) 수용과 초기의 성장(1884년 ~ 1919년)

1884년 알렌(H.N.Allen)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온 이후, 역시 북장로교회의 교육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 미 감리회의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1885년에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 이후 매우 다양한 교파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고 각각 선교활동을 한다. 초기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과, 아직 선교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서 의료, 교육의 활동에 치중하였다. 그 시기가 서구 열강의 침투와 일본의 침략주의, 신민주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조선의 봉건사회가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의 활동들은 조선 민족으로 하여금 서구 문명과 그와 동일시 되는 기독교를 선망하게 만들었고, 교육활동은 근대의식, 민족의식의 고양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노일 전쟁 시기에는 전쟁 상황 속에서 외국인의 소유로 인식된 교회의 힘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원하는 민중들의 입교와 독립협회 등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데 기독교를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이유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많은 성장을 보이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던 1907 ~ 1910년에 교회는 대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길선주 목사가 인도하는 사경회에서 이 부흥운동은 그 절정에 이르렀고, 계속적인 부흥운동으로 이어져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연결된다. 이 운동을 통해 교회가 정화되고 성장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일본의 침략이 악랄해져 가던 그 시대의 한국의 상황을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부정적 측면도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한국교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견사인 신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을 통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장투쟁운동이나 해외에서의 민족운동을 통한 개인적인 신앙의 표출과 항일 경제운동도 전개된다. 그러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그 준비, 확산 과정에서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참여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의 한국교회는 순수한 신앙,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냄이란 측면보다는 민족운동 우선의 지향형태를 취하면서도 그것이 신앙으로 체화된 민족의식으로 연결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3) 사회변화와 시련 속에서의 한국교회 (1920 ~ 1945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선교사들의 친일적 성향과 지적인 빈곤이라는 상태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에서는 내세 지향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부흥회 운동이 일어나고 일부에서는 공산주의 침투에 대응해서 온건하면서도 광범위한 사회, 경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민지 현실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뱡향 탐색은 좌절케 된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친일적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선교사들의 신전의식(神前意識)의 결여에서 비롯되고 한국교회의 든든하지 못함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에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친일로 전향하게 되고, 여러가지의 종파운동이 일어난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에는 장로교회의 분열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신사참배' 라는 우상숭배가 한국교회의 목을 조이게 된다. 여기에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님을 선언하게 되고,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치욕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급기야 1945년 7월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어 민족교회로서의 자존심마저 상실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시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싸움과 고난이 있었고,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려지게 된다. SFC의 근본적인 정신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생각할 때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교훈을 준다고 하겠다.

   4)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와 선교 100주년의 의미

해방 이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 정화, 교회 재건운동이 기치가 올려지나 신사참배 참여자들의 거부로 실패하게 된다. 더구나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남북의 분단의 상황 속에서 교회마저 분열의 길로 치닫게 된다. 1946년에는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강력하게 한국의 회개를 부르짖게 된다. 그러다가 민족의 비극인 6.25 동란을 맞게 되었건만 교회는 분열을 계속하게 되는 수치를 드러낸다.

1951년 7월 고려파가 분리되고, 1954년 기독교 장로회가 분리되며, 1959년에는 예수교 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게 된다. 또한 기독교 정권이라 하여 반민족적이고 비도덕적 정권인 이승만 정권을 무조건 지지하는 몰역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통일교나 전도관 등의 이단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역사 참여에 대한 인식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정치 중성화' 라는 미명하에 친정권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1979년대는 통일 논의가 있게 되고, 반공, 안보 우성 논리를 고집하는 측과 이에 맞서서 사회정의, 민주주의 실천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양립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결핍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70년대 후반에는 민중신학이 민족분단과 산업화에 따른 사회·민족적 고민이 중심이 된 신학 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역사는 1984년에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으면 지금의 한국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자각과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회로서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애통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역사는 역사와 민족 속에서 동일한 죄의 반복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뒤엉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3. 한국 기독교회의 특징들과 반성점들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면서 세계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비교,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 운동의 방향 설정이라는 목표를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1) 급격한 성장과 서구화의 과정

한국 교회의 성장은 민족의 고난기 속에 들어와서 개항, 식민지화 등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기독교의 이데올로기화 내지는 정치적 도구화의 위험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반봉건, 반외세의 투쟁에 기독교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했고 초기 신자들의 입교 동기도 현실적인 요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한국 민족의 전체적 현상이기도 하다. 즉, 서구열강들과 일본을 동일하게 제국주의자로 보지 못했고 그래서 자본주의 문물 그 자체가 그들의 침략도구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침략자 일본에 비해 서구열강들은 그 문명으로 인해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런 과정에 기독교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영일동맹(1902년)이나 가쓰라-태프트밀약(1905년) 등 서구의 방조와 암약하에 한일합방이 이루진 것을 심지어 선교사들 조차조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1901년의 선교사들의 교회중립화 선언이 결국은 친일로 흐르게 하였고 선교사들의 사치나 경제 이권 침탈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00년대의 식민지화 과정 속에서의 대부흥운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한느 것일까. 결국 1920년대에는 선교사들의 서구적 교파주의나 제국주의적 자세 등으로 인해 반미·반선교사적인 경향이 등장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의 실체를 보지 못함으로써 해방의 은인(?)인 미국으로 경도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해방과 6.25 등을 겪으면서 교회의 서구화·자복주의화를 부채질하게 되어 양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우리게 되지만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반성과 올바른 위상정립의 여유를 상실하였다. 즉, 지나친 문량학에 따르는 부단한 자기개혁 및 구조적 악을 보는 눈이 부재하여 세속주의가 교회 속에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양적 성장에 대한 컴플렉스에 걸려있다. 교회당 건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더라도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을 드러내지 못할 때 미련없이 그들을 버리셨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그리스 정교회의 파멸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역사를 바르게 보지 못하고, 지나친 서구화로 흐른 것은 하나님 앞에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교회의 명백한 죄악임을 지적하고 싶고 양적인 축복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특징은 신학의 부재나 올바른 기독교 교육과 양육의 부실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2) 신학의 부재

이러한 거대한 제목은 세계 교회사나 세계 신학의 흐름 속에서 규명되어야 하겠으나 역량의 부족으로 지금 한국 교회 속에 드러나는 현상 중심의 기술이 될 수 밖에 없겠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은 올바른 신앙을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토착화나 신학교육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긍정적인 면도 있아나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초기 선교사 중심의 교회운영 등은 한국인 신학자들, 기독교 지도자들의 양성에서 빈곤을 초래하였고, 평양신학교나 협성신학교 등이 있었지만, 올바른 신학의 정립보다는 성급하게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 시대 후반에 김재준 목사 중심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지는 하나 교회분열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도 급격한 시류 속에서 신학의 토착화나 자기희생적인 인격을 소유한 교회 지도자들의 양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이것은 어린 한국 교회의 발육을 정체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국 교회의 비윤리성, 비도덕성, 몰역사성은 이 문제와 직결된다. 개인 구원의 지나친 강조와 서구 신학의 영향 등으로 인해 성(聖)과 속(俗)을 분리하게 되는 근본주의적 흐름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나마도 교회 속에서의 깊이 있는 신앙교육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삶에 있어서의 청결을 몰각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많은 신학대학과 신학교가 있고 본질적인 기독교 신학이 많이 유입되고 연구되고 있다. 그런 한편 신학은 신학교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교회의 삶과는 괴리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올바른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을 살아있게 하고 교회를 건전하게 세우며, 역사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립과 생활화는 한국 교회사적으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며 SFC의 사명은 매우 중대하다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된 신앙의 원리들이 가르쳐진다면, 역사 속에서의 오류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믿는다. 서구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학이 아닌 참으로 귀한 보편적 하나님의 진리가 신학교와 교회, 개인에게 가르쳐지고 신앙되어질 수 있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전진할 것이다.

   3) 분단의 상황

한국교회사의 또다른 특징은 한국교회가 민족분단의 원인과 과정, 그 결과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박순경에 의하면 분단은 외세들에 관련된 미국의 주도 아래서 발단되었으며, 이 지배세력과 국내의 친일세력, 그리고 기독교계의 반공노선의 결탁에 의하여 고정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식 결핍으로 설명될 수도 있으나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가 아닌 이데올로기로에 빠진 죄악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 민족의 분단은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으로서 한국 교회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이다. 갈라진 남북한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구조적인 악과 부정적인 요소들이 어느것 하나 분단이라는 상황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분단은 민족적 단일성 회복이라는 낭만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분단이 가져온 구조악을 극복하는 것으로 지향되어야 하며, 그래서 전쟁이나 외세에 의한 통일은 불가하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한국 교회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대체로 한국의 기독교는 다수가 정치적 보수주의나 반공사상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며 평화적인 통일이나 통일협상은 공산화의 위험이 있고, 공산화의 통일보다는 무력으로 자유를 지키는 분단된 남한이 더 낫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분단' 이란 상황 속에서 궁극적으로 보여주시려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찰하고, 역사적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과오들과 그 이전에 하나니 ㅁ앞에 철저하지 못했던 죄악들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삶에 대한 책임의식과 민족 속에 드러나 죄악의 결과들을 가슴 아파하면서 진정한 분단의 해결을 위한 통일 논의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4. 한국 교회사 속에서의 학생신앙운동의 위치

이상에서 나는 한국 기독교회사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이러한 특징 들 속에서 학생신앙운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개혁신앙이라는 훌륭한 전통을 물려받은 우리가 역사와 민족 속에서 어떻게 그 빛들을 드러내어야 할 것인가? 도 지금 당장의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일까? 앞에서의 논의에 기초하고, SFC 강령과 역사를 함께 고려하면서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본질적으로 학생신앙운동은 회개운동으로 출발하였다.

한국교회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배반했는지 모른다. 짧은 교회역사를 생각하면 연약한 교회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교회사 속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신사참배나 교회의 분열, 역사적 과오 등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통치를 다시 받고자 하는 회개의 운동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모습이 더욱 세속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회의 분열과 신사참배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해방 후 상황 속에서 교회 지도자와 어른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으로서 정말 순수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자 하는 회개의 운동으로 우리의 운동은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출발은 매우 의의있는 일이었다. 이후 수양회를 거듭하면서 이러한 회개의 정신은 일제 말기의 선배들의 순교정신과 더불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 민족을 돌아보고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이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변혁을 할 것인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는 감정적인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변의 한국사와 교회사 속에서 부지런히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도아보아야 했고,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가슴 아파했어야 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슴 앞에서 순결해지고자 하는 운동의 당연한 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회개운동은 민족의 현실과 괴리된 감이 없지 않았으며 그것은 곧 우리 운동의 정체를 초래하였다. 끝없는 자기변혁은 반드시 죄에 대한 애통함을 동반하므로, 우리에게는 시대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부둥켜 안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눈물로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비굴함이나 후회가 아니라 우리 운동의 전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이다.

   2) 학생신앙운동은 신앙운동, 선교운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학생들이다. 우리의 운동은 세계변혁이나 민족의 개혁을 그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니 나라의 확장만이 우리의 목표이다. 따라서 우리의 운동은 우리들 스스로가 삶의 전 영역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넓혀나가 이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운동이며, 더불어 우리가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 운동은 신앙이 우선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우선이다. 일제시대 후기에 YMCA 등의 기독교 사회운동이 친일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각 각 운동원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의식의 결여나 투쟁방법의 오류는 부차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운동은 외침이 아니라 철저한 훈련과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운동의 요건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철저하고 성경중심의 운동이어야 한다. 우리의 회개운동도 말씀 앞에서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방향이나 행동원리도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교회사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고 신학적인 토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세속주의나 우상숭배가 판을 쳤음을 확인할 수 있고, 지금도 그것은 절실하게 요청되는 바이다. 우리에게는 개혁신앙이라는 유산이 있다. 우리 운동의 목적은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여 양육과 전도가 이루어져야 하고 개혁주의 신앙의 전수가 이루어 져야 하며 그러므로 철저한 커리큘럼이 준비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올바른 성경적 원리와 세계관을 가지고 역사와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보다 효과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역사 의식과 안목의 구비가 요청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치열하다. 분단의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탄과 전쟁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고 사탄의 광란을 제거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개화기나 일제시대에 한국교회가 역사와 민족 앞에 범했던 동일한 죄악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역사는 클 것임을 믿는다. 또한 이러한 역사의식은 각 전공영역에서의 실력배양을 필요로 한다. 즉,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이것은 어렵고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운동은 늘 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운동은 움직임이며, 그 움직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추진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위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 한 사람의 온전한 신앙인을 기르고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회사에서 위대한 선배들이 많았다. 그들은 왜소한 개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결함을 한국교회의 기초로 놓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철저하게 신앙운동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 중심의 운동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나 민족이 절대화될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더욱 예리한 지성과 뜨거운 영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그 운동은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것이다.

   3) 철저한 교회 중심의 운동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순결하면 그 사회도 건전했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사회가 그러했고 영국의 대각성기나 청교도 시대의 사회가 그러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이 부패했을 때, 하나님은 그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심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은 그런 의미에서 교회 청결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청결하고 순수했던 적이 있었던가? 초기의 입교 동기나 일제시대의 모습들은 다분히 정치적이었고 도피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이 순결하지 못하다 하여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애끄소 노력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초기 서북지방 신앙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하는 열망은 뜨거움과 간절함 그것이었다고 생각되며 주기철 목사님 등의 많은 섬배들의 신앙 양신의 표출은 교회를 사수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다수의 장황한 사업들보다는 소수의 순수함을 통해 한국교회를 지켜오셨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신앙운동은 한국 교회의 순겨함을 위해 태동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의 부단한 개혁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한국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초석이다. 더불어 나라와 민족의 역사적인 아픔들과 구조적인 죄악에 대한 철저한 자각은 교회의 순겨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부패했다고 해서 교회를 함부로 떠나거나 버려서는 안되며 그럴수록 더욱더 교회의 바른 모습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부단히 나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이다. 교회의 급격한 성장에 따르는 지나친 물량화와 민족의 아픔인 신학이 부재된 한국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분단의 상황 속에서, 우리 운동의 첫 번째 도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운동은 하나의 개 교회나 하나의 교파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교회를 떠난 단체나 새로운 유형의 교회도 아니다. 오직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학원 속에서 학생된 신분의 순수함과 지성으로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확립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서 갈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한국 교회, 우리의 개체 교회는 하나님 앞에 견고하게 서 갈 것을 믿는다.

5. 맺음말

지금 한국의 교회와 이 시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간절하게 찾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탄생은 수많은 이들의 눈물 어린 기도와 피나는 수고와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죄악들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자기의 죄뿐 아니라 민족과 교회의 죄를 애통해 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개혁주의 신앙인이 필요하다. 이 일을 누가할 것인가? 우리 학생신앙운동의 일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우리의 모습을 보길 원하며 우리의 운동이 올바른 방향이 제시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의 정체성의 확립은 한국교회 속에서의 복음의 정체성, 기독교의 정체성의 확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