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SFC/SFC 역사

추억을 더듬어서 [제자들 4호, 1994]

노랑 테니스 공 2023. 12. 5. 19:35

※ 『제자들』 은 미주SFC 소식지 입니다.

이원홍

※ 이 글은 초대 한국 SFC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수고한 SFC 대선배이신 이원홍 동문이 1994년 미주 SFC 대회에 참석하면서 강사이신 최학량 목사님에게 전달하신 원고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한국 초창기 학생신앙운동 수련회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숨이 막힐듯한 신학교 강당에서 땀으로 옷을 적시면서 한 시간을 아멘으로 보냈다. 이것이 바로 제1회 하기 수양회였다. 박윤선, 한부선, 한명동, 최의손, 마두원, 송상석, 노진현, 이상근, 이인재. 이 여러 목사님들을 강사로 1948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것이다. 고등학교 (남) 31명, (여) 6명 / 중학고 (남) 68명 (여) 18명 / 국민학교 10명 / 기타 22명. 모두 155명이 모였다. 그리하여 한 주일을 즐겁게 은혜 가운데 지났던 것이다. 때로는 송도의 백사장에서 하루를 유쾌히 보냈던 때도 있었다. 이것이 우리 "수양회" 의 시작이었다.

1949년 북풍이 여윈 나무가지를 흔들어대는 겨울, 또 다시 제2회 수양회가 모였다. 추위와 싸우면서 뜨거운 성신의 불을 받기를 열망하는 마가의 다락방 같았다. 박윤선, 한부선, 외의손, 마두원, 오종덕, 노진현, 이종필, 한상동, 한명동, 이인재. 믿음으로 우리의 갈 길을 보여주시는 이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배우고 기도하고 웃고 즐겼던 것이다. 대학교 2교 / 중학교 (남) 43개교 (여) 14교로 196명의 동지들이 경남, 경북, 충남 등지에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함께 부민동 고등성경학교에서 합숙하고 한 주일을 지냈다. "교회사" , "성경연구" , "질의응답" , "음악" 등으로 1월 11일부터 16일까지의 시간을 꾸몄던 것이다. 다시 굳은 악수로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것이 제2회 수양회 였다.

1949년 여름, 부산의 하늘이 유달스리 푸르고 때때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촉감을 일으키는 염열의 날, 또 다시 제3회 수양회가 열렸다. 때는 벌써 정계의 신앙사조에 분별이 지워진 때이었다. 박윤선 교수의 "치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 는 진비를 가르기 좋아하는 학도들의 가슴을 통쾌히 하였다. 대학교 4교 / 중학교 (남) 36교 (여) 13교. 로 모두 202명의 동지들이 말썽 많은 신학교 강당으로 찾아 왔던 것이다. 자리는 협소하고 바람은 잘 통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마음 속에 삼키고 보니 한 없이 늙은 것 같고 흐르는 땀은 시원한 생명수 강 같았다. 불평없이 한 주일을 박윤선, 함일톤, 마두원, 한부선, 오종덕.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지냈다. 여름은 즐거운 때라는 하루도 있었다. 이종식 집사께서 빌려주신 트럭에다 전 회원은 몸을 싣고 암남리 가축 위생 연구소 해안에서 즐겁게 하루를 지났다. 그리하여 해풍과 볕 살에 검어진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가슴에는 큰 포부를 지니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 다시 1950년 1월 하늘의 별들이 추워서 깜박이는 날. 교회당 안에 난로에는 보기 좋게 활활 불꽃이 춤추고 둘러 앉은 동지들의 얼굴에는 새삼스러운 각오가 웃음과 함께 피어 오르던 날. 벌써 3회의 지난 역사를 가진 제4회 수양회가 다시 신학교에서 열렸다. 그동안 소식이 궁금하던 동진들을 다시 반갑게 만났던 것이다. 박윤선, 황철도, 오종덕, 함일톤, 함부선.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지냈으며 겨울 긴 밤은 대부분 기도로 보냈던 것이다. 16시도 34 교회에서, 대학교 1교 / 중학교 (남) 27교 (여) 10교의 144명의 동지들이 다시 찾아 왔던 것이다. "신약연구" , "구약연구" , "심리학" , "변증론" , "종교개혁사" 등등의 진지한 강의에 자신을 망각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시대의 전주였던지 이 집회가 끝난 뒤 곧 이어 6월에 민족 수난의 비애가 있었던 것이다.

1951년 전화의 여름, 부산으로 밀려오는 피난 무리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동안 4회에 걸쳐 낮익은 동지들은 모두 헤쳐졌다. 부산은 임시 수도로 되었다. 거리에는 이채를 띄우는 UN군들의 왕래가 심하여 졌다. 살기도 높아졌다. 힘찬 청년들은 모두 일선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대로 무더운 여름 피난 살림에 얼굴 주름살이 잡히는 생활에도 어김이 없이 모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난을 고하는 학도의 모습이었다. 총, 칼, 싸움, 죽음, 학원, 공부, 벗 ... 이런 것들이 서로 엉키어서 머리를 시끄럽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양회" 의 한 주일은 소망의 시간이었으며 갱생의 시간이었다. 그날 헌병으로 간 박군도 나오고, 공병으로 간 이군도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참 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서로 손을 꽉 쥐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뢰로 병든 조국, 망하여 가는 조국을 살리자고 약속하는 귀한 모습이었다. 한 주일을 지난 "수양회" 는 각각 사명대로 현실 구제로의 길로 나갔던 것이다. 전장으로, 학원으로, 하꼬방 속으로... 그러나 가슴에는 새로 솟아오르는 희망과 포부가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5회 수양회도 마치고 우리의 역사는 4년이란 과거사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고난의 의의를 찾아서

6.25는 두 돌을 지났다. 그러나 수난의 날은 언제 그칠른지 수수께기에 미루어져 있는데, 가장 현실적 사명을 띤 "고난의 의의" 를 찾게 되었다. 부산 학생신앙운동 집행위원회에서는 약 두 달 전부터 제6회 "수양회" 를 준비한 것이었다.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일을 토의했으나 그렇게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정면에 아무런 가능성 있는 예산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 위원회를 모이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산 없이 이 일을 시작할 것을 겨우 가결하였다. 그 때의 위원들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가리워졌던 구름이 맑게 벗겨진 것 같았다. 이렇게 몇 번 밤을 세워 토의한 나머지 시작케 되었다.

위원회는 먼저 기도하는 가운데 이 집회의 성격을 밝혔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현실을 살리는 것은 :"고난의 의의" 밖에는 없었다. 이것을 감사히 가결하고 모두를 이 표제 밑에 통일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외교회와 유지에게 재정원조를 간청하였다. 의외에도 크게 도와주셔서 무난하였던 것이다. 예산이 없이 시작한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인간윤리에는 합하지 아니하는 신의 논리인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이 일을 감사한다. 그리고 위원회는 "수양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과 같은 부서처를 두었다.

사무부 : 황창호 / 조사부 : 김병도 / 보도선전부 : 홍치모 한기태 / 재정부 : 박성금 황창호 / 안내부 : 정상호 한동희 김상철 / 음악부 : 박영훈 / 취사부 : 조용석 이복임 이한식 / 회보편집위원 : 이영일 조영석 이원홍
(원안대로 되지 못했음)

이렇게 구성하고 제1착으로 강사 교섭을 하였다. 여기에도 큰 난관이 있었다. 그것은 7월 28일부터 경남교회 지도자 대회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고 교섭을 진행키로 하였다. 의외에도 여러 강사님은 과중한 짐을 용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시간표의 작성을 보았다.

제6회 학생신앙운동 수양회
(1952. 7. 21(월) ~ 7.28(월))

04:40 - 06:30 회개하라 천국은 임하였다 (한명동 목사)
07:30 - 09:00 아침식사
09:30 - 10:30 그리스도와 인간고 (박윤선 교수)
10:45 - 11:45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민족수난의 의의 (한명동 목사)
12:00 - 01:30 점심식사
02:00 - 03:00 신의 본질과 심판 (이성근 교수)
03:10 - 04:10 분과연구회 / 제1일 순교자 신앙생활
                                         / 제2일 교회음악
                                         / 제3일 종교교육의 실제 문제
                                         / 제4일 현대 기독교 사조
                                         / 제5일 학생신앙운동의 실제 문제
                                         / 제6일 학생신앙운동 대회
                                         / 제7일 학생연합예배 (한상동 목사)
04:20 - 05:20 신앙 학도의 고백
05:30 - 07:00 저녁식사
07:30 - 09:20 저녁집회 (주강사 한상동 목사)
                                      (개회식 박윤선 목사)
                                      (합창 : 교회연합 성가대, 학생연합 성가대) 

그러나 강사 관계로 안대로 진행치 못하고 야가간의 변동이 있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또 집회 진행상에 큰 나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계 휴가 문제이다. 문교 지시로 7월 25일, 26일에 방한하게 된 고로 마음이 있는 학생들도 참석치 못한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너무나 감사하였다. 그것은 진주, 대구, 마산 기타의 지방에서는 학과를 희생하고 출석한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경제난을 뚫고라도 은혜의 자리에 참석하리라고 금식을 각오하고 온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무더운 여름을 하루 종일 신학교 강당에서 지냈다. 갑갑하기도 하겠고 덥기도 하겠고, 여러가지 불평할 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을 삼키고 이겼던 것이었다.

부르는 찬송 소리는 폭포와도 같이 우렁찼으며, 은혜를 사모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뜨거웠다. 밤 집회는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숨길 수 없어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게 된다. 정말 여기서 조국을 살릴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특별히 대구, 마산의 동지는 한국교회 부패상의 쓰라린 경험을 토하여 많은 동지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리로 강철같이 굳게 연합될 것을 바란다.

그리고 식사에도 큰 난점이 있었다.그것은 식수난과 식량의 부족이었다. 그러나 시내 각 교회에서 "찬" 의 보조가 컸으며 특히 남교회 박봉화 집사님의 지대한 원조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한 주일은 지나간 것이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가장 값있는 시간이었다. 지방 사정 간담회, 침목회 등으로 동지애가 더 한층 두터워 졌다. 우리의 "수양회" 결실을 보았다. 그것은 진리 보수를 위하여 동지가 성신으로 단결할 것이었다.

이것이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지방에다 독립성 있는 학생신앙운동을 두고 이것이 유기적인 연합으로 생명있는 신앙운동을 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제6회 "수양회"는 끝났다. 우리 이 집회의 "고난의 의의" 를 찾았다. 민족흥망의 원리를 알았다. 이번에 받은 하나님 말씀으로 각각 자기의 처소로, 현실 구제로 출발했다.

우리의 동지를 잊지 말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집회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수고하신 여러 강사님과 협조하신 시내 각 교회와 유지, 신앙단체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편집후기

* 언제 지났는지 벌써 약속의 한 주일은 지냈습니다. 무엇인지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사정이 허락하면 일년이라도 하면 시원하겠습니다.
* 은혜로운 강의를 편집의 차점으로 오히려 그 장점을 막지 아니할까 걱정스럽습니다.
* 그리고 급법의 회보는 소식 중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논의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좀 딱딱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들이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믿습니다.
* 읽을실 때 마다 "수양회"의 감격한 장면을 연상하시고 진리 파수에, 공동책임을 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우리의 의무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생활과 사상을 가지고 현실을 구제합시다.
* 박 목사, 한명동 목사, 한상동 목사, 이 목사 이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더 하실 것과 연구의 은혜를 주실 것과 몸이 건강하실 것 등으로 잊지 마시고 기도합시다.
* 이 여러분들을 이어서 나갈 책임이 동지들에게 있는 것을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 모쪼록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고 몸도 건강하시고 연구에 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끝으로 편잡자의 실수가 있으면 용서하시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하시기를 빕니다.
   (이원홍 기)